의병(義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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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서 1910년 사이 전라남도 영암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의병은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무력 항쟁으로 이를 타개하고자 각 지방의 유생과 농민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이다. 항일 의병의 시작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일 감정에서부터 출발하였는데, 호남 지역의 경우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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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곽재구(郭在九)[1889~1932]의 본적은 전라남도 나주 봉황(鳳凰)이고,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 신북(新北) 양계 마을이었다.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에 참가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곽재구는 1907년 심남일 의병 부대 부장(部將)인 권택(權澤)의 부하로 호남 일대에서 의병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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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 김선중(金善仲)[1885~1912]은 영암 출신으로, 박사화(朴士化)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 헌병 보조원을 사살한 죄목으로 1912년 사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김선중은 나주 출신 의병장 박사화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전라남도 나주와 영암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주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군과의 교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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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김성재(金聖載)[1877~1942]는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신으로, 1907년부터 1910년 시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의 후군장(後軍將)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김학선(金學善), 김학호(金鶴鎬)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김성재는 1907년 11월 1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에서 심남일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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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육군 장성. 김종관(金鍾悹)은 영암군 덕진면 용산리 출신으로,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김종관은 단국 대학교 정치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조선 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 경비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어 그해 6월 15일에 조선 경비대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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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 김치홍(金致洪)[1880~1910]은 영암 출신으로, 활동 당시 영암 신흥리 1003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심남일(沈南一), 박민홍(朴民洪), 박사화(朴士化) 의병 부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치홍(金致弘), 김동필(金東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김치홍은 1908년 10월 심남일 의병진에 가담하여 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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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나성화(羅成化)[1881~1910]는 나주(羅州) 왕곡(旺谷) 출신으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무안(務安), 영암(靈岩), 남평(南平)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나성화(羅聖化), 나상집(羅相集)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1907년에 박영근(朴永根)·유종환(兪鍾煥)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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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박민홍(朴民洪)[?~1909]은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하다가 1909년 일본군 영암 수비대와의 전투 중 순국하였다. 박민홍은 1908년 12월경 나주·함평(咸平) 등지에서 약 40~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1월 2일에는 총기로 무장한 의병 40명을 인솔하고 무안읍을 습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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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박사화(朴士化)[1880~1912]의 본적은 전라남도 나주 지량(知良) 기촌(基村)이고, 의병 활동 당시 주소지는 나주 전왕(田旺)이었다. 전라남도 함평에서 의거한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2년 순국하였다. 박사과(朴士過), 박사홍(朴士弘)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박사화는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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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장. 신예교(辛禮敎)[?~1908]는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출신으로, 구국 결사대를 조직한 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과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남시(南市)이고, 본명은 신재빈(辛在彬)이다. 신석황(辛錫璜)의 3남으로 태어났다. 신예교는 1902년 영암에 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구국 강론(救國講論)을 듣고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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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심남일(沈南一)[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고, 호는 덕홍(德弘), 자가 남일(南一)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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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여성 의병. 양방매(梁芳梅)[1890~1986]는 영암군 금정면(金井面) 남송리(南松里) 출신이다. 의병장 강무경(姜武景)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의병 활동에 투신하였다. 양방매는 전라북도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에 유숙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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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오경리(吳慶履)[1813~1893]는 영암군 학산면(鶴山面) 은곡리(隱谷里)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영암 서호면 구적동정사(球積洞精舍)에서 수학하였고, 18세 때에는 영암 구림 문수암(文殊庵)에서 수학하였다. 영암에 거주하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고종 때 공조 참판을 지냈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화(仲和), 호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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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 유시연(柳時淵)[1864~1909]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신북면(新北面) 모산리(茅山里)이다.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약한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에 들어가 의병 투쟁을 하였으며, 1909년 8월 17일 일본군과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유관옥(柳冠玉)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유시연은 1909년 7월 30일 심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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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장. 이덕삼(李德三)은 영암 출신으로, 본명은 김덕중(金德仲)이다, 1908년부터 1909년 사이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이덕삼은 호남 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1908년 9월 11일부터 1909년 3월 1일까지 일본인 26명을 피살하고, 36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909년 3월에서 7월 사이에 각지에서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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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육군 장성. 이백우(李白雨)[1919~?]는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출신으로, 군사 영어 학교와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준장을 지냈다. 이백우는 광복 후 미 군정청이 세운 군사 교육 기관인 군사 영어 학교를 1946년 5월 1일에 졸업하였으며, 대한민국 육군의 중견 및 고급 장교를 교육시키기 위해 1951년에 설립된 육군 대학을 나왔다. 6·25 전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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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이복근(李復根)[1879~1910]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곤일시면(昆一始面)이었다. 박사화(朴士化) 의병 부대 소속으로 항일 투쟁을 하였고, 1910년에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이복근은 1908년 2월에 박사화 의병 부대에 들어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사화는 전라남도 함평(咸平)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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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이화삼(李化三)[1866~1910]은 장성 출신으로, 1905년부터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법성포(法聖浦), 무장(茂長), 고창(高敞), 영암, 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1910년 1월 28일 순국하였다. 본명은 이영신(李永信)이고, 자가 화삼(化三)이다. 이화삼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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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임영화(林永化)[1884~1910]는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1909년 나성화(羅成化) 의병 부대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나주, 무안, 영암, 남평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임영화는 나성화 의병 부대에 소속되어 장포(長砲)의 직임을 맡아 대일 항쟁의 선봉에 섰다. 1909년 7월 군사들과 함께 전남 무안부(務安府) 삼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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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 정관오(鄭官五)[1883~1921]는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신북면(新北面) 유곡리(酉谷里)이다. 1907년 심남일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전라남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정순용(鄭淳龍)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관오는 1907년 11월 1일에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거한 심남일(沈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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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정낙중(鄭洛仲)[1884~1910]은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다. 1907년부터 김태원(金泰元)[일명 김준(金準)] 의병 부대, 박사화(朴士化) 의병 부대, 나성화(羅成化) 의병 부대 등에 참여하여 영암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낙중은 1907년 김태원 의병 부대에 들어가 200여 명의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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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 최병손(崔秉巽)은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출신이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후예로, 자는 자환(子懽), 호는 송남(松南)이다. 홍매산(洪梅山)의 문인 이낭해(李朗海)에게 수학하였으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최병손은 1896년 이장헌(李章憲)·조경환(曺景煥) 등과 함께 영암 지역의 유림을 규합하여 총수가 되었고, 단발령 반대 및 반외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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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최우평(崔羽平)[1878~1908]은 나주(羅州) 출신으로, 1907년 12월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하여 주로 영암 등 전라남도 일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나주 노안(老安)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최우평은 1908년 3월에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가 600여 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할 때 부대에 합류해 후군장(後軍將)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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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추기엽(秋琪燁)[879~1909]은 전라남도 담양 출신이다. 1907년부터 전라북도 지방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1908년에는 전라남도 해남·영암 등지에 의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추기홍(秋淇弘), 추기엽(秋琪曄)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추기엽은 1907년 전라북도 익산(益山) 지역에서 윤현보(尹賢甫)·이봉오(李奉五)...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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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전라남도 영암군의 인물. 영암 지역에서는 조선 말기부터 식민 통치가 이루어진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이어졌다. 국가 보훈처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지정받은 인물가운데 영암과 관련된 인물은 총 63명이며, 이 가운데 39명이 영암 출신일 정도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의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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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에서 만세 운동을 주동한 독립운동가. 김재홍(金在洪)[1892~1938]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해창리(海倉里)가 본적이며, 1919년 4월 10일에 펼쳐진 영암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김재홍은 1919년 4월 10일 영암 장날에 펼쳐진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고, 직접 참가하였다. 김재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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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문사훈(文士勳)[1903~1979]은 1930년대 초반 영암에서 비밀 결사인 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고, 1932년 일제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문사훈의 본적은 전라남도 영암군 장암(場岩)이며, 독립운동 당시 장암에 머물고 있었다. 생몰년은 독립 유공자 포상 자료에 따르면 1912년 4월 17일~197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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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에서 시위운동을 주동한 독립운동가. 문성선(文性善)[1912~?]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場岩里) 579번지이다. 1931년 9월 영암에서 청년회를 조직한 후 항일 투쟁을 논의하였고, 이듬해인 1932년 6월 항일 시위를 강행하였다. 문성선은 1931년 9월 영암군 영암면 교동리(校洞里) 최판옥(崔判玉)의 집에서 김판권(金判權)·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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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규상(朴奎相)[1893~1921]은 1919년 경성 약학 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인 영암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박규상은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 약학 전문학교생(京城藥學專門學校生)으로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독립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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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수봉(朴壽奉)[1909~1948]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과 활동지는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德津面)이다. 1932년 덕진면에서 발생한 소작 쟁의에 참여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수봉은 박한기(朴漢己), 박한동(朴漢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 영암군 덕진면에는 야학이 개설되어 일제 식민 통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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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유성(朴裕成)[1907~1958]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과 활동지는 영암군 덕진면(德津面)이다. 1932년 영암 지역의 소작 쟁의에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진상(朴珍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박유성은 1931년 영암군 덕진면에 야학을 개설하고 이듬해 「처(妻)의 후회」라는 연극 공연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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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현채(朴炫埰)[1924~?]는 영암 출신으로, 본적지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서구림리(西鳩林里)이다. 일제 말 광주 사범 학교(光州師範學校) 재학 중 무등 독서회(無等讀書會)를 조직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3년 3월 광주 사범 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현채는 조규학(趙圭學)·옥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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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흔홍(朴炘弘)[1886~1966]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이다. 1919년 4월 10일 영암군 군서면에서 발생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았다. 박흔홍은 1919년 4월 10일 군서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한오(崔漢五)·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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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영암 출신의 농민 운동가. 신원범(愼元範)[1908~1970]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과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이다. 1920년대 일본 유학을 통해 신사상을 흡수하였고, 고향에 돌아와 소작인들을 옹호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원범은 1931년에 일본에서 고향 영암으로 돌아온 후 최판옥(崔判玉), 곽명수 등 지역 인사들과 신사상 연구와 항일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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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광주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철(李相哲)[1912~?]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망호리(望湖里)이고, 활동 당시는 광주 농업 학교(光州農業學校) 내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광주 농업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에 광주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학교에서 퇴학되고 감옥에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독립 유공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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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실(李鍾實)[1915~1948]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도포면(都浦面) 성산리(聖山里)이다. 일제 말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미국 정보 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종실은 1945년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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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창희(李昌熙)[1911~1959]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望湖里)이다.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여수 적색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렀다. 활동 당시 이창의(李昌儀), 강만수(姜萬洙), 강재동(姜才童)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이창희는 1928년 3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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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춘수(李春洙)[1911~1948]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삼호읍 용앙리이다. 일제 강점기 비밀 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9년 광주 학생 독립활동 시위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춘수는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7월 초순, 전라남도 광주(光州) 소재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서 송동식(宋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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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상조(鄭相祚)[1882~1927]는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서구림리(西鳩林里)이다. 1919년 영암 지역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았다. 정상조는 1919년 4월 10일 오전 군서면 동구림리(東鳩林里)의 구림 보통학교(鳩林普通學校) 내에서 박규상(朴奎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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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학순(鄭鶴順)[1892~1950]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성양리(省陽里)이다. 1919년 영암 지역 독립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정학순은 1919년 3·1 운동 당시 구림리(鳩林里)에 거주하는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박규상(朴奎相) 등과 서로 연락하여 영암읍내와 구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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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에서 활동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 조극환(曺克煥)[1887~1966]의 본적은 전라남도 영암 송평(松平)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 교동(校洞)이다. 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창녕 조씨(昌寧曺氏)인 아버지 조병헌과 어머니 김금옥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영암의 향리 가문으로 비교적 윤택하였다. 1919년 영암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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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목포에서 활동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문환(曺文煥)[1907~1949]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영암면 교동리(校洞里)이다. 1927년 신간회 목포 지회 간사를 지냈으며,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 및 청년 운동을 통한 항일 운동에 힘을 쏟았다. 조문환은 조선 일보사 목포 지국(木浦支局)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26년 목포 무산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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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조병식(曺秉植)[1892~1926]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이다. 1919년 영암 지역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조병식은 1919년 4월 7일부터 9일 사이의 기간에 영암군 군서면사무소에서 박규상(朴奎相)·최기준(崔琪焌) 등과 함께 독립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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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희도(曺喜道)[1892~1923]는 영암 출신으로, 홛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서구림리(西鳩林里)이다. 1919년 독립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에 최한오(崔漢五)·박규상(朴奎相)·조병식(曺秉植) 등의 주도로 영암읍 장날에 전개된 영암 지역 3·1 운동 때, 조희도는 군서면 동구림리(東鳩林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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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주창업(朱昌業)[1886~1932]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 신북(新北) 월평(月坪)이다. 1919년 화순, 광주 등지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주창업은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한 후 조선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전라남도 화순에서 의병장 출신인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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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항일 학생 결사인 성진회에서 활동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규창(崔圭昌)[1908~1949]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東鳩林里)였다. 1926년부터 광주 비밀 결사 모임인 성진회(醒進會)에서 활동하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고, 고향인 영암에서 소작 쟁의를 주도하였다. 최규창은 광주 고등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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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규철(崔圭哲)[1913~1992]은 영암 출신으로,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이다. 1932년에 소작 쟁의를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규철은 1932년 3월 김판권(金判權)·최판옥(崔判玉) 등의 동지들과 함께 덕진면 운암리(雲岩里) 지역 지주들의 소작권 이전 횡포에 항거하여 운암리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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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기섭(崔琪燮)[1912~2002]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이다. 1930년대 영암에서 야학과 농민 조합 건설 준비 위원회 활동을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1912년 10월 16일에 태어난 최기섭은 1927년 3월 영암군 구림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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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기준(崔琪焌)[1896~1957]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호는 지암(芝菴)이다. 활동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西鳩林里)이다. 1919년 영암 지역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영암 지역에서는 영암읍의 조극환(曺克煥)·정학순(鄭鶴順)과 서구림리의 박규상(朴奎相)·최한오(崔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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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동환(崔東煥)[1907~1946]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금정면(金井面) 아천리(鴉川里)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였다. 1932년 3월 영암에서 연극을 공연해 주민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고, 소작 쟁의를 주도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1931년 6월에 영암읍 내의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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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석호(崔碩鎬)[1910~?]는 영암 출신으로,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이다. 1930년대 초 영암에서 연극 공연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고, 소작 쟁의에 간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최성호(崔成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최석호는 영암군 덕진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식은 야학에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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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성심(崔聖心)[1868~1939]은 영암 출신으로,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이다. 1919년 4월 10일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었다. 영암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4월 10일 영암읍 장날을 기해 일어났다. 이날 최성심은 군서면 동구림리(東鳩林里)의 구림 보통학교(鳩林普通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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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하의철(河誼喆)[1907~1980]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미암면(美岩面) 채지(採芝) 마을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양동(良洞)이었다. 광주 지역의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醒進會)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의철은 광주 사범 학교 3학년 재학 시절에 광주 지역의 중심적 항일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