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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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炘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흔홍(朴炘弘)[1886~1966]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이다. 1919년 4월 10일 영암군 군서면에서 발생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았다.
[활동 사항]
박흔홍은 1919년 4월 10일 군서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한오(崔漢五)·박규상(朴奎相)·조병식(曺秉植) 등 군서면 인사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고,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읍내의 조극환(曺克煥)·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旼燮)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4월 10일 영암 장날을 기해 동시에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박흔홍 등은 구림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 본부로 정해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인쇄하면서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고, 거사 당일 이른 아침부터 선언서를 읍내 각처에 살포한 뒤 오전 9시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박흔홍은 조희도(曺喜道)·박성집(朴成集) 등과 함께 구림 공립 보통학교에 직접 들어가 학생 300여 명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행진하는 등 만세 시위의 선봉에 섰다.
박흔홍은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15일 광주 지방 법원 장흥 지청에서 출판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대를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흔홍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