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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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裕成 |
이칭/별칭 | 박진상(朴珍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유성(朴裕成)[1907~1958]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과 활동지는 영암군 덕진면(德津面)이다. 1932년 영암 지역의 소작 쟁의에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진상(朴珍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박유성은 1931년 영암군 덕진면에 야학을 개설하고 이듬해 「처(妻)의 후회」라는 연극 공연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3월 22일에는 문사훈(文士勳)·박수봉(朴壽奉)·신용주(愼鏞周)·신용점(愼鏞點)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덕진면 운암리(雲岩里) 지역의 소작권 이전 횡포에 항거, 운암리 청년 회관에 청년회원 수십 명을 모아 놓고 소작권 이전 방지 대책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1932년 6월에는 청년회원 수십 명을 모아 덕진면 영보리(永保里) 영보정(永保亭)에서 소작권 이전 방지에 관한 대책을 협의한 후, 운암리와 백계리(栢溪里) 방면의 신구(新舊) 소작인 집으로 몰려가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을 꾸짖으며 소작인들을 구타하였다. 이후 박유성은 소작 쟁의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 행진을 이끌었다.
박유성은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었고, 1933년 9월 29일 광주 지방 법원 목포 지청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34년 3월 7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 및 벌금 20원을 받기까지 미결 기간 동안 1년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유성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