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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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石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집필자 | 최연식 |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 소재하고 있거나 이전에 소재하였던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씨.
[개설]
금석문(金石文)은 글자 그대로 쇠붙이와 돌에 새겨진 글씨를 의미하는데, 근래에는 포괄적으로 금속이나 돌뿐 아니라 나무와 그릇 또는 기와 등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 등도 아울러 일컫는다. 금석문은 긴 세월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록자의 신원과 연대가 표기된 경우가 많고 중앙 중심의 문헌 자료를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높으나, 기록 대상을 미화한 경우가 많다는 한계도 있다.
[고대와 고려 시대의 금석문]
영암 지방의 고대 금석문으로는 군서면 서구림리에서 발견된 ‘정원명 석비’가 유일하다. 이 비는 786년(원성왕 2)에 영암 지역의 불교 신자들이 갯벌에 매향(埋香)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 관련 기록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고려 시대의 금석문으로는 영암 성풍사지 5층 석탑의 탑지(塔誌)[1009년], 군서면 도갑리와 동구림리에 있는 석 점의 도갑사 장생석(長生石)[1090년], 서호면 엄길리의 매향 석각[1344년] 등이 있다. 이들은 각기 고려 시대 지역민들의 불탑 건립, 사찰 장생 제도, 매향 신앙 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일본 히로시마의 쇼렌지[照蓮寺]에 전하는 고려 시대의 동종(銅鐘)에는 963년 영암군 남서쪽에 있던 고미현(古彌縣)[또는 昆湄縣] 사찰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금석문]
조선 시대의 금석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 전기의 매향 사실을 기록한 미암면의 ‘채지리 매향비’[1430년]와 조선 전기 도갑사에서 활동하며 왕실의 총애를 받은 묘각 화상 수미(守眉)의 행적을 기록한 ‘도갑사 수미 왕사비’[1633년], 영암 출신의 대표적 고승인 선각 국사 도선과 묘각 화상 수미의 업적을 현창한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1653년], 선조의 정비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동생인 ‘박동열(朴東說) 신도비’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에 공을 세운 ‘김완(金完) 장군 신도비’[1805년] 등이 있다.
그밖에 ‘영암 향교 하마비’와 ‘도갑사 석교(石橋) 중창비’[1633년], ‘도갑사 조계곡(曹溪谷) 석교 신창비’[1653년], 도갑사 석조(石槽) 명문[1682년], ‘덕진교비(德津橋碑)’[1813년], 지방관들의 선정비와 효자·열녀들을 현창하는 비석과 정려 등이 있다. 효자·열녀들의 비석과 정려는 19세기의 것이 많으며 지방관들의 선정비는 영암 향교에 7기, 금정면 아천리에 4기, 학산면사무소 입구에 4기, 도포리 동도포 마을에 2기 등이 남아 있다.
[근대의 금석문]
근대의 금석문으로는 문중에서 조상들을 추모하여 건립한 신도비와 유허비, 흉년이 들었을 때 주민들을 구제한 부호들의 시혜비들이 다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