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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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헌 |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흙을 파서 일구거나 고랑을 칠 때 쓰는 농기구
[개설]
가래는 긴 자루가 달리고 양쪽으로 줄을 달아 여러 사람이 협동으로 줄을 잡아당겨 흙을 파거나 떠서 던지는 데 쓰이는 농기구다. 이 가래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농기구로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예컨대 화가래, 종가래, 넉가래 등이 있는데, 이 중 화가래는 나무를 자루에 직각으로 박고 가랫바닥 끝에 쇠로 된 날을 붙인 것을 말한다.
이 화가래는 괭이의 전신으로 비교적 무른 땅을 파거나 논도랑 치기, 골타기, 무논 삶기 등에 사용되며 혼자 쓰기에는 종가래보다 오히려 편리한 농기구다. 무논의 경우 하루에 165.2㎡ 정도 갈 수 있다. 종가래는 삽과 같이 밀어서 흙을 떠내는 농기구로 생김새는 가래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작고 군두새끼[가랫바닥 양쪽 위의 구멍에 꿰어서 가랫줄을 얼러 매는 가는 새끼]가 없어 혼자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넉가래는 나무로 만든 날이 큰 삽의 일종으로 곡식을 널거나 퍼 담을 때 쓰는 농기구다.
[연원 및 변천]
통일신라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래는 바닥의 흙을 파서 일구거나 고랑을 치고 두둑을 만드는 일, 밭둑이나 논둑을 깎는 일, 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무논에서 논을 갈거나 논바닥을 고르는 일에 썼다. 가래에 대한 명칭은 『천일록(千一錄)』에서 ‘가레’로 표기한 적이 있지만 그 이전 시기에 나온 『훈몽자회(訓蒙字會)』나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에서는 지금처럼 ‘가래’로 표기했다. 또 이 문헌에서는 한문으로 험(杴) 또는 철험(鐵杴)으로 적었고, 『천일록』에서는 한자음으로 가내(可乃)라 썼다. 화가래는 쇠붙이가 귀하던 시절 목제로 만든 가랫바닥 끝에 쇠 날을 붙여 쓰던 농기구였으나 쇠로 견고하게 만든 괭이가 보급되면서 점차 농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형태]
화가래 의 전체적인 형태는 괭이와 비슷하다. 나무로 만든 가랫바닥을 자루에 직각으로 박고 가랫바닥 끝에는 U자 형태의 쇠 날을 붙였다. 영암 지역의 화가래는 자루의 길이는 1~1.5m 정도이고, 가랫바닥은 너비 15~20㎝, 길이 25~30㎝ 정도가 보통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우리말에 “가래로 막을 일, 쟁기로도 못 막는다.”, “가랫밥도 쌓인 데가 쌓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앞의 것은 작은 문제를 내버려 뒀다가 큰 일로 확대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가랫밥이란 가래질을 하여 쌓은 흙인데 무슨 일을 하더라도 유달리 마음 가는 곳이 있다는 뜻의 말이다. 또 “가랫장부는 본 고을 좌수도 몰라본다.”라는 속담도 있는데, 이는 가랫자루를 쥐는 사람과 같이 무척 무례하고 분수없는 사람을 두고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