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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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葛頭山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용규 |
[정의]
조선 시대 영암 지역 사자봉에 있던 봉수대.
[개설]
갈두산 봉수(葛頭山 烽燧)는 조선 시대 영암군에 속하였는데 1906년 행정 개편으로 해남군에 편입됨으로서 이후부터는 해남군에 속하게 되었다.
[건립 경위]
갈두산 봉수는 서남 해안 지역의 해로 상의 요충지에 위치한 입지 조건으로 보아, 수군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갈두산 봉수가 운영되고 있던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영암군 달량진-갈두산 봉수-어란진-해남현 화산 봉수 및 관두산 봉수’의 순서로 분포하고 있었다. 갈두산 봉수는 동쪽의 달량진과 어란진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면서, 이들 수군진과 이웃하고 있는 봉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 운영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육지부의 최남단인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 마을 땅끝[土末]의 해발 109.6m 사자봉 정상부에 위치한다. 갈두산 봉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암군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강진 좌곡(佐谷)에 준하고, 서쪽으로 해진 화산(花山)에 준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갈두산 봉수는 동쪽의 강진현 좌곡산 봉수[해남군 북일면 내동리 원동 마을 봉대산]에서 연락 받아 서쪽의 해진군 화산 봉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고 적고 있어 서쪽의 경우 관두산 봉수로 명칭이 달라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화산 봉수의 정확한 위치는 2013년 현재로서는 확인되고 있지 않으나, 1451년(문종 1) 4월에 민가의 연기가 봉수의 연기와 섞이기 때문에 서로 구별이 어려움으로 관(館)[관두량] 근처로 옮기도록 함으로써 봉수의 위치가 옮겨진 데 따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문종 이후 봉수의 서쪽은 지금의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의 관두산 봉수로 위치가 바뀌었으며, 이후 17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에도 마찬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
전라남도 여수 돌산도 봉수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 서울의 목멱산[남산] 봉수로 이어지는 제5거 직봉 노선의 연변 봉수로서 연대(煙臺)는 직경 15m 내외의 둥근 형태이며, 바윗돌과 할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현황]
갈두산 봉수는 『여지도서』부터는 기록에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보아 17세기 중반~18세기 후반 사이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달마산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조사 당시 연대는 1~2단 정도의 석축 흔적만이 남아 있었을 뿐 많이 파괴된 상태이었다. 남아 있는 유구와 주위에 무너진 석재들로 보아 연대의 하부는 바윗돌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막돌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후 파괴되어 있던 연대는 전망대 앞쪽에 막돌을 이용하여 직경 4.5m의 원형(圓形)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완도와 해남·진도를 연결하는 해로 상의 요충지에 설치하고 운영한 봉수로서 왜구의 침입 경로 상에서의 입지뿐만 아니라 조운로의 운영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던 봉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