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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702
한자 婚禮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집필자 박종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평생 의례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각종 의례.

[개설]

혼인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두 사람의 성적·경제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혼인과 관련된 각종 의례가 혼례인데, 혼례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혼례식만을 말하는 좁은 의미의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양쪽 집안에 혼담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혼인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넓은 의미의 것이 있다.

[연원 및 변천]

인류의 혼인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그와 관련된 의례 또한 그만큼 오래되었을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조에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다.”라는 기록과 고구려(高句麗) 조에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기록을 통해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의 풍속과 함께 신부가 해를 넘겨 우귀(于歸)[혼례식을 마치고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것]하는 풍속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혼례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 시대로 보이는데, 고려 말에 수용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지배 계층의 예법으로 규정하여 시행한 것이 조선 초이며, 일반 서민의 예법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이른바 신식 결혼식을 행하게 되었는데, 요즘 영암 지역에서는 예식장에서 혼례식을 거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에 신부 집에서 거행하던 혼례식은 이제는 전문 예식장이나 교회 등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예식도 현대식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낮에 결혼을 하면서 촛불을 점화한다든지 결혼식이 끝난 후에 폐백을 드린다든지 하는 모습에서 전통 혼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절차]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혼례는 혼담이 오간 후 사주를 교환하고 혼례 날짜를 잡고 나면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예물을 전하는 식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혼례식은 신부 집에서 치르고 식이 끝나면 신부가 시댁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절차는 영암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지역이나 집안에 상관없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암 지역에서 행해졌던 일반적인 혼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혼인 적령기

결혼하는 시기는 개인적인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통상적으로 인식하는 적령기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여자는 15~16세, 남자는 20세를 전후로 결혼했는데, 특히 여자들은 징용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하는 편이었다. 해방 후에는 남자는 20대 초반, 여자는 20세를 전후로 결혼했으며 혼인 적령기가 지난 여자를 일컬어 ‘노큰애기’라 불렀다.

2. 중매(仲媒)와 통혼(通婚)

중매는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간 친지나 이웃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하고 중매쟁이 또는 중신애비라고 불리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으로 중매하는 사람에게 요청하기도 한다. 중매할 때에는 집안의 가풍(家風)과 가세뿐만 아니라 집안의 내력, 성씨 등에 유의하며 특히 집안 내력이 좋고 문중이 클수록 상대방의 성씨와 집안 내력을 많이 따진다. 영암 지역 내에서는 번성한 성씨였던 영보 마을전주 최씨, 구림리낭주 최씨, 장암리남평 문씨 사이에서 통혼이 잦았다고 한다. 가문 외에도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虎食]이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자살한 사람이 있는 집안과 통혼하는 것을 꺼리고 큰 병에 걸린 사람이 많은 집안과 통혼하는 것도 가린다.

3. 사성(四星)과 날받이[택일(擇日)]

양쪽 집안이 서로 혼담이 성사되면 예비 신랑의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적은 사주(四柱)를 보내는데, 이를 영암 지역에서는 사성(四星)이라고 한다. 사주를 보낼 때에는 집안에 따라 날을 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신랑의 사주가 신부의 집으로 오면 신부의 사주와 맞추어 혼인할 날을 정하는데, 보통 신부 집에서 택일을 하지만 두 집안이 서로 논의하여 신랑 집에서 하기도 한다.

4. 초행(醮行)

혼인 당일이 되면 신랑은 혼례식을 치르기 위해 신부 집으로 가는데, 이를 초행 또는 “장가간다.”라거나 “장가든다.”라고 한다. 신랑의 초행에는 함을 지고 가는 사람과 짐꾼이 동행하며 집안의 남자 어른 중에서 한 사람을 상각[상객(上客)]으로 정하여 함께 간다. 신랑 일행이 신부가 사는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신부 집으로 들어서지 않고 ‘주점’에 머문다. 신랑 일행이 주점에서 쉬고 있으면 함을 지고 온 사람은 신부 집에 함을 전달한다.

5. 전안례(奠雁禮)

신랑이 주점에서 신부 집으로 이동하면 함을 진 사람은 목기러기(木기러기)를 들고 신랑의 뒤를 따른다. 신랑이 신부 집 대문을 넘으면 신랑에게 목기러기를 건네고, 신랑은 목기러기를 품에 안고 혼례상 앞으로 가서 상 위에 올린다. 영암 지역에서는 혼례를 초례라고도 하므로 혼례상을 초례상이라고도 한다. 상 위에는 암수 한 쌍의 닭과 동백나무·대나무·소나무 가지를 꽂은 화병을 하나씩 놓는다.

6. 혼례식

혼례 는 의식의 순서를 적어 둔 홀기(笏記)에 따라서 순서대로 이루어지는데, 목소리가 크고 청아한 사람을 집사로 정하여 홀기를 읽도록 한다. 신부가 혼례상 앞에 서면 신랑이 먼저 두 번 절하고, 신부는 답배로 네 번을 절한다. 절을 마치면 신랑과 신부가 혼례상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아 각자의 잔에 술을 따라 상대편으로 보내 준다. 표주박잔을 돌린 후에는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로 두 표주박잔을 하나로 맞추면 혼례식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된다.

7. 신랑의 큰상 받기

혼례식을 마치면 신부는 안채로 들어가고, 신랑은 상각과 함께 사랑방이나 별도로 마련된 방으로 인도되어 큰상을 받는다. 큰상은 교자상 위에 제사를 지내듯 밥·과일·육류·어류 등의 음식을 골고루 차린 것으로, 격식을 갖추는 의미로 준비한다. 큰상을 받은 후 신랑과 상각은 신부 일가와 인사하고 서로 술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신부는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초야를 치를 시간을 기다린다.

8. 초야(初夜)

초야를 치르는 방은 보통 안방으로 하는데, 이때 간단하게 술상도 준비해 둔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 신랑이 신부의 머리 장식을 풀고 혼례복을 벗긴다. 초야를 치를 때 신부의 일가친척이 몰래 방 안을 훔쳐보기도 하는데, 신랑이 초야를 잘 치르는지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9. 신행(新行)

초야를 치른 후 신부는 신랑과 함께 시집으로 가는데, 이를 신행 또는 “시집간다.”라고 한다. 보통 혼례식을 치르고 하루 만에 신행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이 지난 후에 신행을 가기도 하는데, 이를 “묵혀서 간다.”라고 말한다. 신행을 갈 때는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는데, 가마 안에 짚을 방석처럼 깔고 가마뚜껑 위에는 호랑이 가죽이나 담요를 덮는다. 신부가 신행길을 떠나면 명씨[목화씨]와 팥, 소금을 사방에 뿌리고 마지막으로 가마 위에도 뿌리는데, 부정을 막고 신부가 시집가서 잘 살라는 뜻이다.

신부의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를 신랑의 상각처럼 신부 집을 대표하는 사람인 요각[요객(繞客)]으로 정한다. 신랑과 신부 일행이 신랑 집에 당도하면 대문 앞에 불을 피워 그 위를 넘어오도록 하는데, 이는 신행을 오는 동안 부정이나 잡귀의 영향을 받을 우려가 있어 이를 없애고자 함이다.

10. 현구고례(見舅姑禮)

현구고는 신부가 예물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부모를 뵙는 일을 일컫는다. 영암 지역에서는 신부가 시부모와 시가의 친척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을 피박[폐백] 또는 구고례[현구고례]라 한다. 신행 당일에는 신랑의 직계 가족인 시부모와 시조부모, 시동생 등에게만 인사하고, 그 밖의 친지들에게는 이튿날에 인사하기도 한다. 영암 지역에서는 폐백닭을 준비하지 않으면 폐백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다.

11. 재행(再行)·권행

신부가 신행을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신랑이 혼자 신부 집을 다녀오는데, 이를 ‘재행’이라 한다. 신랑이 재행을 갈 때는 신랑 집에서 혼수품에 대한 답례로 떡과 엿, 과일 등을 마련해 가며 신부 집에서는 이에 대한 답례로 음식을 마련하여 신랑 편에 보낸다. 결혼하고 1년에서 3년이 지나면 신랑과 신부가 함께 신부의 친정을 다녀오는데, 이를 권행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는 부부가 함께 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재행과 권행이 통합·간소화되었고, 요즘은 신혼여행 후에 부부가 신부 집에 함께 다녀오는 것으로 바뀌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영암 지역에서는 생활환경이 변모하면서 과거에 가정에서 치르던 혼례식은 전문 예식장이나 교회 등에서 서양식으로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촛불을 밝히거나 폐백을 행하는 등 과거의 혼례식과 절충하는 모습 또한 보이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예식장에서 치르는 정형화된 혼례식 대신에 전통 혼례식을 행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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