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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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麒瑞 |
이칭/별칭 | 인길(仁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탁현진 |
[정의]
조선 전기 영암 출신의 문신.
[개설]
조기서(曺麒瑞)[1556~1591]는 생원시에 장원을 할 정도로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낙향하여 지내다 서른일곱의 나이로 사망해 주변을 매우 애석케 하였다.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인길(仁吉)이다. 충정공(忠貞公) 조상치(曺尙治)의 7세손으로, 증 예조 판서(贈禮曹判書) 창산군(昌山君) 조계은(曺繼殷)의 증손이고 별제를 지낸 조응경(曺應卿)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을 지낸 조세준(曺世俊)이고 어머니는 현령(縣令) 이숙(李淑)의 딸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활동 사항]
오윤겸(吳允謙)[1559~1636]·김상용(金尙容)[1561~1637]·이홍주(李弘胄)[1562~1638] 등과 파산(坡山)[현 경기도 파주시]에서 성혼(成渾)[1535~1598]에게 사사받았다. 1582년(선조 15) 생원으로 태학에 머루를 때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호남의 선비인 강해와 양천경(梁千頃)이 연루되자 조기서는 그들의 억울함을 말하며 신원을 구하는 상소를 올려 반대파의 미움을 샀다.
주변의 다른 생원들이 조기서의 의로운 행위를 천거하여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조기서의 태도를 반대파가 벌하려고 하자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도와주어 영암 서호(西湖)로 돌아와 지내다 서른일곱의 나이로 죽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