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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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才浦 |
이칭/별칭 | 성재 포구 |
분야 | 역사/근현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 1869번지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변남주 |
제정 시기/일시 | 1949년 - 성재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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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80년 - 성재포 영산강 하굿둑 완공으로 소멸 |
비정 지역 | 성재포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 1869번지 |
성격 | 포구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에 있었던 포구.
[개설]
성재포는 영암군 소호면 성재리 무송동 마을 동쪽에 있었다. 지금 학산천의 하류에 해당하여 성재 포구의 아래에서, 학산천과 영암천이 합류한다. 1940년대 말 학파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새로 만들어진 포구이다.
[명칭 유래]
포구가 성재 마을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1957년 성재포에 건립된 간척 기념비에 의하면, 영암군 학산면 출신 사업가 현준호(玄俊鎬)[1889~1950]가 1939년부터 1949년까지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 사이에 학파 방조제를 막아 학파 농장을 만들었다. 제방의 서쪽에는 무송동 마을이 있는데, 간척 공사 당시 공사 현장이었다. 무송동 마을이란 이름도 현준호의 호인 무송(撫松)에서 따온 이름이다.
1949년 학파 방조제에 의하여 아천포의 뱃길은 차단되었고, 대신 제방 아래에 성재 포구가 형성되어 아천포의 기능을 이어 받았다. 성재 포구는 1970년대까지 목포와 영암 해창 간을 왕래했던 객선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되었는데, 영암군 서호면 일대의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1980년 영산강 하굿둑이 막히면서 뱃길은 중단되었고, 1990년대까지 내수면 포구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어장이 황폐화되면서 포구만 존재할 뿐 그 기능은 사실상 상실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포구 기능이 정지되고 포구에는 폐선 10여 척이 현존한다.
한편 문화 체육 관광부의 ‘강변 문화 관광 개발 기본 계획’에 따라, 사업비 32억 6000만 원[국비 16억 3000만 원, 군비 16억 3000만 원]을 들여 시종면 옥야리 남해 포구 1만 412㎡와 서호면 성재리 성재 포구 2456㎡를 조성하고 편의 시설 및 문화 체험장 등을 조성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또한 7억 5000만 원[국비 3억 7500만 원, 지방비 3억 7500만 원]을 들여 역사 문화 체험 탐사선 1대를 제작해 성재포와 남해포를 잇는 뱃길에 띄우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하지만 영암군이 재정적 부담이 가중될 것을 예상해 국고 보조금을 반납하면서 사업이 중단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 1869번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