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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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浦口 |
이칭/별칭 | 신포,조동포,장흥창,원해창,뱃마테,구해창,망호 해창,배나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배날리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남주 |
폐지 시기/일시 | 1980년 - 배널리 포구 영산강 하굿둑 완공으로 소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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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 지역 | 배널리 포구 - N 34° 48′59.4″, E 126° 41′10.6″[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58-5] |
성격 | 포구 |
관련 문헌 | 『여지도서』|『영암읍지』|『동국여지지』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마을에 있었던 포구.
[개설]
망호리 배널리 포구는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며, 원해창 또는 구해창이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12대 조창, 즉 장흥창이 설치된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위치는 부춘정 동쪽 건너편으로 비정되며, 속칭 ‘뱃마테’ 또는 ‘배나테’라고도 하였다. 바다였을 당시에 갯고랑이 망호리 배널리 포구와 부춘정 앞을 돌아 흘렀으며, 일제 강점기에 이 갯고랑으로 목포를 왕래하는 영암호가 다니기도 하였다. 구해창의 건너편 부춘정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된 정미소와 조곡 창고가 있었으며, 현재는 축사로 이용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배널리 포구에는 대동미 등을 실어 나르는 영암 해창이 설치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이고, 『영암읍지(靈巖邑誌)』에서도 “해창(海倉)은 읍의 북변 5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부춘정 앞 배널리를 말하는 것으로, 배널리는 영암읍과 직선으로 약 2㎞에 있어 기록과 일치한다.
[명칭 유래]
배널리는 배나루의 와음(訛音)에서 유래한다.
[형성 및 변천]
고려 이전에는 신포(薪浦)라고 하였으나 고려 전기에 조동포(潮東浦)로 개칭하고, 고려 12대 조창인 영암군 장흥창(長興倉)을 두었던 곳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분명한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고적조의 “고장흥창(古長興倉)은 군(郡)에 있었으며, 고려 초기에 설치하여 인근 군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한 12대 조창으로 지금은 토성(土城)의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다른 고적과는 다르게 별도의 거리를 명기하지 않고 ‘재군(在郡)’이라 한 것으로 보아 군소재지 인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 섬을 싣는 초마선(哨馬船)의 뱃길로 보아 포구는 영암읍 북쪽 망호리 배널리 포구로 볼 수 있다. 인근에서 토성의 흔적도 약하게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망호리 배널리 포구에는 대동미 등을 실어 나르는 영암 해창이 설치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항의 기능을 하였다. 한때 목포를 왕래하던 객선(客船)이 다니기도 하였으나, 해저의 퇴적으로 수심이 낮아지면서 큰 배인 짐배의 운항이 어려워지자 군서면 해창으로 이동되고 작은 배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배널리 포구는 1980년 영산강 하굿둑 완공으로 바닷물이 차단되면서 포구 기능을 상실하였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마을의 서쪽에 있었다.
[관련 기록]
“고장흥창은 군에 있었으며, 고려 초기에 설치하여 인근 군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한 12대 조창으로 지금은 토성의 터가 있다[古長興倉 在郡 高麗初設倉 收附近州縣租稅漕 至京 卽十二倉之一 今有土城基址].”[『동국여지지』 고적조]
“해창은 읍의 북변 5리에 있다[海倉在邑北邊五里].”[『여지도서』 창고조]
“해창(海倉)은 읍의 북변 5리에 있다.”[『영암읍지』 창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