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54
한자 燧院
이칭/별칭 부수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변남주

[정의]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 부선 마을 지역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시대의 숙박처.

[개설]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영암의 수원(燧院)은 신북면 부선 마을에 설치된 원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원은 폐원되고 꼭 필요한 곳에서만 운영되었으나 수원의 경우는 조선 시기 내내 부선 마을에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참 제도와 함께 역부와 역마를 이용하여 관물의 수송, 공문서의 전달하는 목적으로 이동하는 관리들에게 숙박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영암읍지(靈巖邑誌)』 등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용]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역원 조에 의하면, 영암군에는 보현원(普賢院), 수원(燧院), 청풍원(淸風院) 세 곳에 원이 있었다. 수원은 영암군의 북쪽 9.82㎞[25리]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 신북면 부선 마을의 부선장[구 장터] 인근에 해당한다. 수원의 수(燧)는 부싯돌을 의미하며, 각종 지리지에서 언급한 방향과 거리도 일치한다. 조선 시대 이곳은 영암에서 올라와서 반남~사포~무안 방향과 나주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목에 해당한다.

[변천]

수원은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 계속 존재하는 영암 지역의 유일한 원이다. 조선 초에 영암에서 나주 가는 역로가 바뀌게 되면서 필요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 시대 해남, 강진, 영암에서 나주를 가기 위해서는 영원재[보현원]를 넘어 오림역을 거치는 것이 역로였지만, 조선 초기가 되면, 나주시 왕곡면 신원등에 신안역이 신설되었다. 따라서 역로가 변동되어 덕진교를 건너 수원과 신안역을 거쳐 나주에 들어갔다. 더불어 덕진면영보역영암읍역리 마을로 이동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