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울 신도시 계획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695
한자 南-新都市計劃案
이칭/별칭 강남 신도시계획 구상, 강남개발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설정임

[정의]

서울특별시가 1961년 박흥식이 제안한 강남개발계획을 바탕으로 1966년 1월 발표한 강남개발계획안.

[계획의 수립배경]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부정축재 혐의자로 박흥식 등을 긴급 구속하였다. 박흥식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중반에 신도시 계획안을 제안했던 민간업자로 군사정권에 협력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다. 당시 최고회의는 박흥식에게 “장차 예상되는 수도 서울 인구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계획을 민간 기업인 입장에서 구상하여 제출하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이에 박흥식한강 남쪽 송파, 가락동 일대에서 삼성동, 역삼동, 서초동, 반포동, 방배동을 거쳐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일대에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개발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획안을 제시하였다.

[계획의 추진과정]

당시 군사정부는 “신도시 건설이 국가적 견지에서는 절대로 필요한 사업임을 인정하나 수입대체산업이나 수출진흥사업 등 제조업 이외의 사업에 정부가 지불보증의 책임을 지는 상업차관을 쓰기는 어렵다고 판단, 상업차관이 아닌, 다른 형식의 외자도입을 외국기업체와 교섭하라”고 지시한다.

박흥식은 1962년 자신의 친일성을 발판으로 일본의 미쯔이 물산이라든가 이도쭈 상사 등을 통해 외자유치에 성공하여 이들로부터 매년 1,000만 달러씩 10개년 간, 총계 1억 달러의 구상무역 협정을 채결하였다. 이에 일본으로부터 시멘트, 페인트, 위생기구, 철근, 철강재, 파이프, 전선, 발전기, 기계류 등을 수입하여 일부는 신도시 건설에 쓰고 나머지는 국내에서 판매하였다. 그 대금으로 신도시 건설비용을 충당하고, 한국에서는 매년 1,000달러 상당액의 생우(生牛), 돼지, 김, 무연탄 등을 일본에 수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최고회의는 신도시 건설을 적극 추진하라 지시하였고, 1963년 1월 박흥식은 화신사업(주) 사장으로 ‘남서울도시계획사업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일본 외자유치에 대한 반발, 박흥식에게 독점적인 개발권 허가 및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지급보증에 대한 반발, 지나치게 넓은 개발면적과 토지실소유자에 대한 대책 부재, 또한 서울의 독자적인 강남개발에 대한 움직임 등으로 인해 사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

1. 한강 남쪽 송파, 가락 일대에서 삼성동, 역삼동, 서초동, 반포동, 방배동을 거쳐 경기도 시흥군 관천면 일대에 이르는 79,338,843㎡[2,400만 평]의 땅을 대상으로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약 11년간에 걸쳐 개발한다.

2. 79,338,843㎡[2,400만 평] 중 개발가능 면적 36,363,636㎡[1,100만 평]의 토지는 일괄 매수한다. 만약에 토지와 가옥을 팔지 않겠다는 소유자가 있으면 공권력의 힘을 빌려 강제 수용한다. 이렇게 일괄매수한 토지를 대상으로 한 가구당 약 297㎡[90평]의 이상적인 주택을 지어 토지, 건물을 같이 분양하거나 토지만을 분양한다. 도로율은 25%로하고 각 급 학교, 공원, 위락시설도 조성한다. 이상적인 전원도시로 하기 위하여 거주밀도 1ha당 100명 정도로 하며 150명은 넘지 않기로 한다. 그러므로 목표인구는 32만 이상 48만 명 이내가 된다.

3. 조성되는 신도시는 결코 베드타운이 아닌, 자족도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상업, 공업지역을 적절히 배치한다.

4. 총사업비는 약 270억 원이지만 신도시건설에 투자되는 직접자금은 150억 원이다. 이 소요자금 중 내자는 15억 원[10%]에 불과하며, 나머지 90% 즉 135억 원은 외자로 충당한다.

5. 내자 15억 원은 주식을 발행하여 조달한다. 물론 발기인인 박흥식 개인과 박흥식이 소유주로 있는 화신그룹이 대주주로 참여하나 나머지는 주택공사와 같은 공공기관, 토지 소유자 및 널리 일반일도 참여케 한다.

6. 외자 135억 원은 일본의 4개 기업체로 이루어진 회사단에서 도입한다. 이 사업개시 후 3년 이내에 각종 물자를 도입하여 이를 매각한 대금으로 사업비에 충당한다. 일본의 회사단으로부터는 계속해서 5천만 달러분의 물자를 수입한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1억 달러분 물자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12년간에 걸쳐 매년 1천만 달러분, 합계 1억 2천만 달러분의 해산물, 축산물을 수출함으로써 상환한다.

[계획의 영향 및 결과]

서울시는 박흥식의 ‘남서울 신도시계획안’을 바탕으로 1966년 강북으로 집중되는 인구를 교외로 분산시키기 위해 남서울 지역에 대한 도시계획안을 완성하여 1967년부터는 가로망 공사에 착수하고 늦어도 1968년 가을에는 일부주택이 들어설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본 계획은 동작동에서 구 경기도의 이천, 언주, 신동, 대치 등 각 면을 거쳐 뚝섬에 이르는 115,702,479㎡[3,500만 평]의 방대한 지역에 새로운 주택지와 경공업지대를 건설할 이 강남지구 사업계획은 12만호,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여 1km를 사방으로 길을 뽑고 주택지 각 블록 안에는 초등학교와 시장, 공원, 상하수도 시설 등을 미리 마련하도록 하였다. 사업은 1966년에 3백만 원을 들여 도시계획의 최종안을 완성하고, 매년 3억 원씩 10년 계획으로 총 30억 원의 자금을 투자하여 시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계획 중이었던 제3한강교[한남대교] 가설공사에 앞서 그와 같은 교량공사가 왜 필요한 것인가를 합리화하기 위해 졸속으로 마련된 계획으로, 1965년 박흥식이 운영하던 화신실업(주)에서 작성한 ‘남서울 신도시계획구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서울시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당시 서울시장이 윤치영 시장에서 김현옥 시장으로 바뀌면서 그 구체적인 실현계획도 수립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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