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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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泳韶 |
이칭/별칭 | 순약(舜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개항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민영소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순약(舜若)이다. 민철호(閔哲鎬)의 아들로 우의정 민규호(閔奎鎬)에게 입양되었다. 1852년(철종 3)에 출생하여 1917년에 사망하였고 경성부 중부 박동 11통 8호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1878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1881년 대교(待敎)의 직책을 시작으로 가주서(假注書)·설서(說書)·교리(校理)·응교(應敎) 등을 거쳐 1882년에 정3품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승진하였다. 민씨 세력의 후원에 힘입어 2년 만에 정3품에 오르고, 관직에 나간 지 6년 만인 1886년 종2품에 오르는 등 빠른 승진을 보였다. 민씨 척족의 거물로 활약하여 임오군란 때 집이 불타기도 했으며,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동자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기 위해 이일직(李逸稙)을 일본에 밀파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홍종우(洪鍾宇)가 상해에서 김옥균을 암살할 때 그 배후 인물로 지목되었다.
1889년에는 정2품으로 승진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廣州留守)를 역임하였으며 1891년에는 종1품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1895년에는 궁내부특진관으로 임명되고 1898년 정1품으로 승진하여 1899년 규장각 학사 겸 일강관(日講官)을 역임하였다. 1901년 학부대신, 1902년 궁내부대신, 1904년에는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을 지냈다.
1910년 6월 한일합병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國民協成會)의 합병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韓國平和協會)의 찬성장(贊成長)을 맡았다.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조직한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식에 조선 귀족 총대로 참석한 뒤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3월 10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