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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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允植 |
이칭/별칭 | 순경(洵卿),운양(雲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1886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김윤식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는 김용선(金用善), 아버지는 좌찬성 김익태(金益泰), 어머니는 이인성(李寅成)의 딸 전주 이씨이다. 1835년(헌종 1) 한성부 북부 전성방 돈녕계 익동 70통 3호에서 출생하여 1922년 사망하였다. 숙부인 청은군(淸恩君) 김익정(金益鼎)의 집이 있는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성장하였다. 유신환(兪莘煥)·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
[활동 사항]
1865년 음직으로 출사하여 건릉(健陵) 참봉을 지내다가 1874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이어 주로 언관직에 있다가 1880년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외지로 나갔다. 1881년에는 영선사(領選使)의 책임을 맡고 학도와 공장(工匠)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가 기기국에 배속시키고,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7차례 회담을 통해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종2품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하고 강화유수를 지냈으며, 1883년에는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이 되어 기기창(機器廠) 설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을 당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제거하고 청나라 군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고, 강화유수 때는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는 등 국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1884년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 이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 관계 업무를 담당하면서 청나라와 가까운 정책을 추구하였다. 1886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통괄하던 광주유수로 부임하여 근무하다가 1887년 면천군(沔川郡)으로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직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석방되어 외무아문대신으로 등용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외무대신에서 물러났다가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종신유배되었다. 1901년에는 지도(智島)로 옮겨졌으며, 1907년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 조치에 따라 풀려나 서울에 돌아와서 황실제도국총재(皇室制度局總裁)를 지냈다. 이후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을 지내다가 1908년 정부로부터 훈일등태극장을 받았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날 때 기호학회(畿湖學會) 회장, 흥사단(興士團) 단장, 교육구락부(敎育俱樂部) 부장, 대동교총회(大同敎總會) 총장 등으로 활약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이용직(李容稙)과 함께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저항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운양집(雲養集)』을 비롯하여 『임갑령고(壬甲零稿)』·『천진담초(天津談草)』·『음청사(陰晴史)』·『속음청사(續陰晴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