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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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慶鎬 |
이칭/별칭 | 회경(會慶),구당(鷗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개항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조경호의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회경(會慶), 호는 구당(鷗堂)이다. 조기진(趙基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상연(金祥淵)의 딸이다. 부인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의 딸이다. 1839년(헌종 5)에 출생하였고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활동 사항]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직장(直長)으로 있을 때인 1865년(고종 2)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규장각 대교(待敎)가 되었다. 1869년 홍문관 부제학, 1871년 규장각 직제학을 지냈으며 이후 내직으로는 형조와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중추원 1등 의관, 홍문원 학사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고 민비(閔妃)가 피신하였을 때 종척집사가 되어 민비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곧이어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임명되어 흉년에 고생하는 백성을 위해 환곡(還穀)을 잠시 멈추게 하는 등 백성의 진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83년에 한성부 판윤을 다시 지냈고, 1895년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907년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으로 있다가 정계를 떠나 은거하였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이후 일제가 남작을 주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