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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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滋悳 |
이칭/별칭 | 중수(仲樹),국헌(菊軒),문헌(文獻)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개항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 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윤자덕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수(仲樹), 호는 국헌(菊軒)이다. 목사를 지낸 윤주진(尹周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원용(鄭元容)의 딸이다. 1827년(순조 27)에 출생하여 1890년(고종 27)에 사망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윤자덕은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1861년 이조참의, 1866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이후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72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지의금부사,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874년 공조판서를 지내고 1875년에는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임명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다스리는 광주 유수직을 수행하면서 여러 차례 백성들의 진휼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여 장계를 올렸고, 광주 무사들의 화포과를 설치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으로 인해 1877년 3월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한차례 더 연임할 것을 명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경기 감사와 직을 맞바꾸었다.
1879년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각 부의 판서를 비롯하여 정부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개항기 격변기에 개혁 세력의 입장에서 관제 개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군중에 의해 가옥이 피습되는 사태를 겪기도 하였으나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86년에는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이후에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등의 요직을 거쳐 189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