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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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冀 |
이칭/별칭 | 성존(聖存),사영(思穎),문헌(文獻)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1864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김병기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이다. 아버지는 판돈령 김영근(金泳根)이며,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윤치승(尹致升)의 딸이며, 부인은 남구순(南久淳)의 딸이다. 1818년(순조 18)에 출생하여 1875년(고종 12)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영향으로 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였다가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사복시정이 되었고, 1849년에는 대사성(大司成)에 올랐고 1850년 이조참의, 1852년 대사헌, 1853년 총융사를 지냈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순탄하여 직제학(直提學)·대사헌(大司憲)·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두루 거치고 각 부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아울러 도성의 방위를 책임지는 훈련대장(訓練大將)·총융사(摠戎使)·금위대장(禁衛大將)·어영대장(御營大將) 등을 지내는 등 화려한 권력의 핵심을 지냈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하면서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있을 때 흥선대원군과 교유한 관계로 고종 즉위 이후에도 주요 관직을 지냈다. 1864년 광주유수로 부임하여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다스리기도 했으며, 1865년 좌찬성, 병조판서, 1867년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내직으로 들어가 병조·공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사영집(思穎集)』이 있다.
[묘소]
김병기의 묘는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김좌근·김병기 묘역에 있었으나 2006년 후손에 의해 개장되어 수목장으로 처리됨에 따라 흔적이 사라졌다. 김병기의 묘비만이 서울대학교 박물관 주변으로 옮겨져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1875년(고종 12)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