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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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基世 |
이칭/별칭 | 성구(聖九),주계(周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정기세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九), 호는 주계(周溪)이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계락(金啓洛)의 딸이다. 부인은 김영수(金永受)의 딸이며, 아들 정범조(鄭範朝)가 우의정을 지냈다. 1814년(순조 14)에 출생하여 1884년(고종 21)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837년(헌종 3)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1842년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각 고을의 부정부패를 보고하였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규장각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등 문한(文翰)의 요직을 지냈다. 이후 내직으로는 각 부의 판서를 역임함은 물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제학(提學)·우찬성(右贊成)·시강원빈객(侍講院賓客)을 지냈고 1875년 한성부판윤, 1876년 이조판서, 1877년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853년 강화유수·전라도관찰사, 1879년 수원유수, 광주유수(廣州留守) 등을 지냈다. 1862년 전국적으로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 형조판서로 이정청당상(釐正廳堂上)이 되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를 비롯한 경기도 광주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는 광주유수를 지냈다.
문장과 글씨를 잘 써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에 참여하였고, 제술관과 문서사관(文書寫官)에 여러 차례 임명되기도 하였다. 겸손한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잘 알려주어 까치판서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