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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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泳孝 |
이칭/별칭 | 금릉위,무량(無量),자순(子純),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개항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하는 광주 유수를 지낸 문신.
[개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로 개화당을 조직하고 조선 정부의 정치적 사회적 체제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갑신정변을 주도하다가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박영효의 주택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30-1에 있었는데 1995~1998년에 남산골 한옥마을로 안채 일부와 문간채가 이전 복원되었다.
[가계]
박영효의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수원 출신으로 아버지는 판서 박원양(朴元陽)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고, 큰형은 박영교(朴泳敎), 작은형은 박영호(朴泳好)이다. 1861년(철종 12)에 출생하여 1939년에 사망하였고 1872년에 결혼하였는데 철종의 부마로 부인이 3개월 만에 죽어 사별하였고, 금릉위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활동 사항]
서울에 거주했으며,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대치(劉大致), 이동인(李東仁) 등 개화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받고 1879년(고종 16)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혁신적인 체제개혁을 지향하는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3개월간 체류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서양의 근대적 제도와 기술 문명을 체험하고 돌아왔다. 이때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그와 함께 동행 하였던 개화파 인사들도 세계 정세에 눈을 뜨고 체제 변혁을 통한 개화와 자주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귀국 후 1883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을 설치하고 신문 제작의 준비를 서두르는 등 개혁정책을 폈으나 민태호(閔台鎬)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4개월 만에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통솔하였던 광주 유수직을 수행하면서는 연병대를 신설하여 신식 군대의 양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이 역시 수구파의 반대로 결실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여러 제도의 개혁 추진이 벽에 부딪치면서 개화당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1884년 10월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청나라 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거주하였으며, 1888년에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이듬해 김홍집 내각을 몰아내고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을미사변에 관여되었다는 연고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1907년 귀국하여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을 때 일본의 고종 퇴위를 반대하다가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910년 일제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은사공채 28만원을 받았다. 1911년 9월부터 1918년 5월까지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회장으로 재임하였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2월 정4위에 서위되었다. 중추원 고문, 조선식산은행 이사를 지냈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간시 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1925년 제3위로 서훈되기도 하였다.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 귀족원 의원, 1939년 중추원 부의장 재직중 사망하였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