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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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景夏 |
이칭/별칭 | 화백(華伯),창하(蒼霞),비와(肥窩),충문(忠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묘가 있었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비와(肥窩)이다. 효종의 부마인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의 손자이며, 목사 원명구(元命龜)의 아들이다. 1698년(숙종 24)에 출생하여 1761년(영조 37)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원경하가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영조가 친히 불러 당색을 띠지 말라고 하였는데 효종의 외손이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정언(正言)으로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호남 지역에 어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교리(校理)·수찬(修撰) 등을 거쳐 1740년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 1741년에 형조참판, 좌윤, 1743년 예문관제학, 1744년 도승지, 1745년 대사헌, 1746년 병조판서, 1748년 좌참찬, 1749년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이외에도 홍문관(弘文館)제학(提學), 각 부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판돈녕부사로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영조 재임기간 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영조가 시행한 탕평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로 동·서·남·북을 모두 수용하는 대탕평(大蕩平)을 주장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창하집(蒼霞集)』 10권이 전한다.
[묘소]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묘소가 경기도 광주 대왕면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에 있었으나 후에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사송동 산 15-2 원주 원씨 묘역으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1772년(영조 48)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