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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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天輔 |
이칭/별칭 | 의숙(宜叔),진암(晉庵),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배 |
출생 시기/일시 | 1698년 - 이천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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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39년 - 이천보 알성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40년 - 이천보 정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49년 - 이천보 이조참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2년 - 이천보 우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61년 - 이천보 영의정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761년 - 이천보 사망 |
거주|이주지 | 이천보 거주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
묘소|단소 | 이천보 묘소 - 경기도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연안(延安) |
대표 관직 | 정자|이조참판|우의정|영의정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거주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이다. 아버지는 옥천 군수를 지낸 이주신(李舟臣)이며, 어머니는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부인은 송상유(宋相維)의 딸이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촌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거주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출생하여 1761년(영조 37)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자가 되고 교리(校理)·헌납(獻納)·장령(掌令) 등 언관직을 역임한 뒤 1749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다. 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고, 같은 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가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176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으로 인해 인책되자 음독 자결하였다. 영조 재임 기간 동안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는데 앞장섰으며, 노론(老論)의 김재로(金在魯)와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영상 자리에 올랐다. 죽은 이후 염습할 옷 하나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지내 사대부들의 칭찬을 받았다.
[학문과 저술]
담론을 잘하여 허식을 차리지 않고 남과 희소(喜笑)하기를 즐겼으며, 시와 문학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진암집』 8권 4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