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523
한자 韓宗愈
이칭/별칭 사고(師古),복재(復齋),양화도(楊花徒),한양부원군,한양군(漢陽君),문절(文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87년연표보기 - 한종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04년 - 한종유 과거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31년 - 한종유 밀직제학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43년 - 한종유 찬성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44년 - 한종유 좌정승 제수
몰년 시기/일시 1354년연표보기 - 한종유 사망
거주|이주지 한종유 거주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淸州)
대표 관직 밀직제학|찬성사|좌정승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앞 저자도에 처음으로 별서를 두고 지낸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고려 말 한양 출신의 정승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한강저자도에 별서를 짓고 강의 풍경과 정취를 즐겼다. 젊어서는 풍류를 즐겼으나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들어간 후에는 원나라와 고려의 복잡한 국내외 정세속에서도 어떠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정론을 펼친 인물로 사회의 신망이 높았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복재(復齋)이다. 증조할아버지인 한원서(韓元諝)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한언(韓彦)은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한영(韓英)은 밀직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287년(충렬왕 13)에 출생하여 1354년(공민왕 3)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한종유는 젊어서부터 풍류를 좋아하여 스스로를 ‘양화도(楊花徒)’라 부르면서 술에 취하면 양화가(楊花歌)를 부르곤 하였다. “얼마 안가서 맑은 바람 불어오면 훨훨 날아 정승이 근무하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양화가는 그가 큰 뜻을 품고 젊은 시절 생활했음을 보여준다.

1304년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나가 사한(史翰), 수찬(修撰),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331년(충혜왕 1)에는 밀직제학이 되었고, 1322년에는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가 국새마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자 원나라로 가 2년만에 국새를 되찾아 왔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이 발생했을 때 이를 무난히 처리하였으며,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조적의 난으로 인해 원나라에 불려간 충혜왕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1344년에는 좌정승에 임명되었고 1349년에 한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여러 차례 왕이 바뀌는 과정에서 왕실을 지지하고 국위를 수호한 공로가 큰 인물이다.

[학문과 저술]

풍류를 즐기고 시문을 많이 지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문선』, 『용재총화』 등에 그의 시문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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