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505
한자 成宗
이칭/별칭 혈(娎),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성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61년 - 성종 자산군으로 봉해짐
혼인 시기/일시 1467년 1월 12일 - 성종 공혜왕후 친영
활동 시기/일시 1468년 - 성종 잘산군으로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성종 즉위
활동 시기/일시 1470년 - 성종 관수관급제 실시
활동 시기/일시 1476년 - 성종 친정 시작
활동 시기/일시 1485년 - 성종 경국대전 편찬
활동 시기/일시 1492년 - 성종 대전속록 완성
몰년 시기/일시 1494년 12월 24일연표보기 - 성종 경복궁 대조전에서 사망
출생지 성종 출생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선릉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삼성동 135-4]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종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성격
성별
본관 전주(全州)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능이 있는 조선 시대 제9대 왕.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혈(娎).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세조의 장자로 추존]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1476년 공혜왕후가 후사가 없이 일찍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두 번째 왕비로 삼았다. 계비가 된 윤씨는 아들 연산군을 낳고 난 후 투기가 심하고 왕에게 불손하다는 이유로 1479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1482년에는 사사(賜死)하였다. 이어 계비로 후궁이던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을 왕비로 삼았는데 그가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폐비 윤씨 사건은 후에 연산군에 의해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아들 19명과 딸 11명을 낳았다. 아들 가운데 연산군이 제10대 왕이 되었으며, 진성대군이 제11대 중종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69년 예종이 갑자기 죽자 정희대비(貞熹大妃)와 대신들이 그를 왕위에 올렸다.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3살로 너무 어렸고, 자산군의 형 월산군은 몸이 허약하였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조선 제9대 왕으로 1469부터 1494년까지 26년간 재위하였다. 1474년(성종 5) 아버지 덕종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다.

[활동 사항]

성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수렴청정과 원상제(院相制)를 통해 통치를 하다가 1476년(성종 7)부터 친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자신의 독자적인 왕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표적으로 한명회신숙주 등 훈구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은거해 있던 김종직 등 사림들을 중앙 정계에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사림 세력들의 비판과 견제를 통해 훈구 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종은 조선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안정된 기반위에 올려놓은 왕이다.

정치적으로는 1485년(성종 5)에 국가의 통치 기반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1492년에는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함으로써 법제적 틀을 완비하였다. 이어 경제적으로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로 인한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 등 부정부패가 발생하자 1470년부터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세금을 거두어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각 군현의 조세를 감면하는 조치를 취하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의 수령이나 변방의 장수를 임명할 때 직접 만나서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으며,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을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다는 규정을 완화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국가 운영의 기반으로 삼은 숭유억불정책을 꾸준히 시행하여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통제한 반면 유학적 조예가 깊은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지어 여러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養賢庫)의 재정을 확충하여 학문 연구를 후원했다. 그리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이 밖에 세종 때 시행하였던 사가독서제를 더욱 확대하여 용산 두모포(豆毛浦)에 독서당(讀書堂)[일명 湖堂]을 설치하고 젊은 관료 5~6명을 선발하여 독서에 전념하도록 배려하였다. 1479년에는 압록강을 건너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두만강을 건너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는 등 국경 확립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학문의 진흥과 서적 편찬에도 남다른 애착과 관심을 표명하여 다양한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대표적으로 전국의 지리와 지방 역사를 담은 『동국여지승람』을 노사신(盧思愼) 등에게 편찬하도록 하였고, 서거정(徐居正)에게는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하여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가 편찬되었다. 이어 역대 학자들의 주옥같은 글을 모아 편찬한 『동문선』이나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 성현(成俔) 등의 『악학궤범』 등 시문과 음악 및 의례 등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기록물들을 남겼다.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삼성동 135-4]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있다. 계비 정현왕후의 능과 함께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릉의 오른쪽 언덕이 성종, 왼쪽 언덕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고, 묘효는 성종(成宗)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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