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038
이칭/별칭 영(嶺),현(峴),치(峙),티,재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집필자 소현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논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151-3지도보기
현 소재지 싸리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 1동지도보기
현 소재지 고인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현 소재지 마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세곡동 산 48지도보기
현 소재지 반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세곡동지도보기
현 소재지 서낭당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현 소재지 밤고개 -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지도보기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산등성이 봉우리 사이의 낮은 부분.

[개설]

고개는 산 능선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중에서 고개를 나타내는 말로 고유어인 재가 있고 한자어로는 령(嶺)·현(峴)·치(峙)[티] 등이 있다. 산으로 가로막힌 두 지역을 넘어가는 길목으로써 두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길이 고개이다. 따라서 고개는 그 지역 산지 중 가장 높은 곳을 통과하는 관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대에 고개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강남구는 산지의 발달이 미미한 편이나 남부에 대모산구룡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성 산지이며, 두 봉우리가 북동동(北東東) 방향으로 연봉을 이루며 개포동서초구 내곡동과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강남구에 분포된 고개는 대부분 대모산 자락의 세곡동 일대에 있다. 고인고개·마고개·반고개·서낭당고개·밤고개 등이 그것이며, 이밖에 강남 도심에 있는 논현동논고개도곡동싸리고개가 있다. 대부분의 고개는 도심과 도로 개발로 인해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동명(洞名)을 비롯하여 도로나 공원 명칭 등으로 고개의 유래를 전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의 지형]

서울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북부·북서부·동북부에는 산지가 많고, 남쪽은 낮고 평평한 U자형 개방 분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한강이 강북과 강남의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전반적으로는 장기간의 침식을 받아 형성된 구릉지형이지만, 한강 주변 특히 한강 이남지역에는 충적지형도 넓게 분포한다.

천도(遷都) 당시 서울에 해당되는 강북 지역은 북쪽의 북악산(北嶽山)[白嶽山][342m], 남쪽의 남산(南山)[木覓山][262m], 동쪽의 낙타산(駱駝山)[駱山][111m], 서쪽의 인왕산(仁王山)[338m]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며, 이들 주변 산지를 따라 도성(都城)이 축조되었다. 남쪽과 북쪽에서 뻗어 내린 산각(山脚)이 점차 낮아지고,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들이 모여 청계천을 이루며, 이 청계천은 동류(東流)하다가 한강에 유입된다.

그러나 현재 서울은 이보다 넓어져서 북쪽에 북한산(北漢山)[836.5m], 도봉산(道峰山)[739.5m], 동북쪽에 수락산(水落山)[637.7m], 불암산(佛岩山)[507m]과 동쪽에 용마봉(龍馬峰)[아차산][348m] 등이 경기도와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이들 산지로부터 서쪽에서는 불광천(佛光川)·사천(砂川), 동쪽에서는 중랑천(中浪川)·옥숙천(玉宿川) 등이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곳곳에 넓은 충적지를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의 강북 지형에 비하면 강남에는 산지 발달이 미미하다. 서남부와 동남부는 충적지나 낮은 구릉지로서 거의 평탄하며 남쪽에는 비교적 높은 관악산(冠岳山)[632m]과 청계산(淸溪山)[493m]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안양천·탄천·양재천 등이 북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면서 충적지가 형성된다.

산줄기들은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남산에서 북쪽으로 여러 줄기가 뻗어내려 낮은 능선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중앙의 종로·청계천 일대는 주변 산지와 계곡에서 운반되는 토사로 평지를 이루었을 것이다. 때문에 종로와 청계천로는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사이에 땅의 기복이 없다. 그러나 뒤편에 있는 퇴계로와 율곡로는 지금도 오르내림이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로와 청계천로 일대에는 산을 넘는 고개는 없었으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에는 많은 고개가 있었다.

이러한 서울의 지형 특성상 서울에는 230개 이상의 많은 고개가 있었다. 이것은 구전되어 내려오는 고개들을 파악한 숫자이며, 실제 고개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형이 변하여 현재 서울시내 전체 고개의 윤곽은 알아보기 어렵다. 고개의 면모를 가지는 것은 무악재·남태령·미아리고개·망우리고개 등 큰 고개들뿐이며,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 도로가 확장되면서 깎여서 고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이렇게 고개의 흔적은 없어졌지만 동네 이름이나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있다.

예전에 인적이 뜸하고 수목이 울창한 험한 고갯길에는 호랑이·여우와 도적떼가 출몰하여 길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개에는 험한 고개를 무사히 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기 위한 서낭당이 많았다. 현재 서울의 고개 이름 가운데 서낭당이고개·서낭당고개·사당이고개·도당재 등으로 불리는 곳이 12개소이다. 강남구에서 서낭당이 있었던 고개는 자곡동 서낭당고개싸리고개가 있다.

[강남구의 옛 고개]

1. 논고개

강남구 논현동 151-3의 논현동 천주교회가 자리한 마루턱에 있던 고개를 논고개, 한자로 논현(論峴)이라고 하였다. 영동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 이르는 산골짜기 좌우로 벌판이 펼쳐져 논밭이 이어졌기 때문에 논고개라고 불렸다. 여기서 유래된 논현동은 조선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동으로 불리던 지역으로써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을 하면서 당시 자연촌락이었던 논고개·언금이부락[언구비]·절골·부처말·비말·사동 등을 병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라고 칭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가을이면 누런 벼가 하늬바람을 따라 아름다운 금빛 물결을 쳤던 논고개 일대는 전형적인 농촌 모습이었으나 현재 강남구의 중심지로 등장하면서 고급 주택과 상업, 업무지역으로 변했다.

2. 싸리고개

말죽거리와 사평나루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 시대에는 수십 년 된 싸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싸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고갯마루에는 이곳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안녕을 빌던 서낭당이 있었으며, 고개에 오르면 서울 남산이 보인다고 해서 서울고개라고도 하였다. 소재지는 강남구 도곡1동으로 말죽거리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지점이다. 지금은 대한투자신탁 연수원과 은광여자고등학교가 이 고개를 경계로 하여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싸리나무와 서낭당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3. 고인고개

지금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강남구 개포동에는 고인돌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고인고개가 있었다. 1947년 7월에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4개의 고인돌을 발견했지만 현재는 모두 없어져 그 위치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4개의 고인돌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으며, 석재는 편마암이고 제일 큰 개석(蓋石)이 3.6×3.75m로서 두께는 85㎜ 정도였다. 이들 4기의 고인돌은 모두 2개의 주석과 1개의 개석으로 구성되고 그 주석이 모두 낮게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4. 마고개

헌릉로 북쪽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은 은곡마을에서 못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마고개[馬峴]라고 한다. 위치가 강남구 세곡동 산 48 일대인데, 마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1860년경 세곡동에 살던 남양 홍씨 홍수근(洪秀根)의 셋째 아들이 힘이 장사여서 집 앞의 연못을 뛰어넘는 등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집안에 장사가 태어나면 나라에 화근이 된다고 하여 이를 걱정한 홍수근이 셋째 아들을 심하게 꾸짖고 매질하였는데, 셋째 아들이 그날 밤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이 고개에서 밤새도록 말이 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을 사람들은 셋째 아들이 말로 환생한 것이라고 믿고, 그때부터 이곳을 마고개라고 불렀다.

마고개가 있는 은곡마을막은골, 망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막은골이란 나무를 심어서 마을의 수구를 막았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망골은 병자호란 때 마고개에서 남한산성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망을 보았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5. 반고개

현재 강남구 세곡동 세곡 사거리가 있는 지역을 반고개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남쪽으로 부산까지의 거리와 북쪽으로 함경도 의주까지의 거리가 각각 천리가 되는 중간 지점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이 고갯길은 조선 시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삼남지방 선비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이었다. 특히 수원에서 판교를 거쳐 반고개를 지나 현재의 수서, 그리고 송파장과 송파나루로 연결되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 고개가 있던 곳은 예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써 일명 잔내개울[細川]이라고도 불렸다. 세곡리는 일제 강점기에 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으로 대왕면의 중심지였다. 반고개라고 불리는 세천리에 50여 호가 살았고 신촌동에 80여 호, 은곡동에 70여 호가 살았다.

6. 서낭당고개

강남구 자곡동의 옛 자연 부락인 못골에서 자양골[紫陽洞]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당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못골자곡동 중앙에 위치하는데,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수서입체교차로를 가다가 율현동과의 경계가 못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못골은 일제 강점기만 해도 광주군에서 큰 마을 중의 하나로 120여 호가 살고 있었다. 못골이라는 명칭은 자곡동 산 32에 조선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李厚原)의 묘가 있는데, 이 묘를 쓰면서 그 앞 자곡동 520에 연못을 팠다고 하여 붙여졌다. 자양골못골 북쪽인 밤고개길 가까이에 있다. 자양골은 서쪽으로 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한 마을이라서 날이 밝으면 해의 붉은 빛을 제일 먼저 받으므로 자양골이라고 부르다가 변음되어 쟁골이 되었다.

7. 밤고개

강남구 율현동에서 세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밤고개, 한자로 율현(栗峴)이라고 한다. 고개 주위에 밤나무가 울창하였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반고개, 방고개라고도 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밤고개의 밤나무들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柳尙運)[1636년~1707년]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유상운은 조선중기의 명신으로 자는 유구(悠久), 호는 누실(陋室), 일퇴(一退),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본관은 문화(文化)로 좌랑(佐郞) 성오(誠吾)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현종 7년(1666)에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 21년(1695)에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판중추부사로서 1701년 장희빈에 대한 처벌에 정상을 참작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당하여 직산(稷山)에 귀양을 갔다가 1704년에 사면되어 이듬해 복직되었다. 1986년 세곡동 사거리에서 시작된 밤고개로가 가락동농수산물시장까지 개통된 동부간선도로와 연결되면서 고개의 지형이 크게 낮아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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