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392
한자 李逈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각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03년 - 이형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55년 - 이형 사망
건립 시기/일시 1696년연표보기 - 이형 묘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1년 2월 5일연표보기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
현 소재지 이형 묘비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 31길 20[수서동 산 10-1]지도보기
성격 묘비
관련 인물 이형|이후재|이욱
크기(높이, 너비, 두께) 전체 높이 233㎝|비신 높이 174㎝|너비 폭 70㎝|두께 23㎝
소유자 광평대군파 종중
관리자 광평대군파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조선 중기 문신 이형(李逈)의 묘비.

[개설]

이형[1603~1655]의 자는 여근(汝近)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후재(李厚載), 할아버지는 군수 이욱(李郁)이고, 어머니는 조수륜(趙守倫)의 딸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유생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원종공신 1등으로 6품관에 오른 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뽑혀 사옹원주부·사헌부감찰·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이어 금산·김포 군수 등의 외직을 역임하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예(司藝)·정언(正言)이 되었다. 1652년 장령(掌令)이 되어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사건 처리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언 황준구(黃儁耉) 등과 함께 대간 신상(申恦)을 탄핵하다가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왕의 노여움을 사서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김육(金堉) 등이 나이 80세 고령의 아버지를 둔 독자로서 멀리 외직에 좌천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환원시킬 것을 누차 왕에게 간청, 1년 만에 다시 내직에 돌아와 헌납으로 있다가 1655년 53세의 나이로 아버지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1684(숙종 10)에 아들 이만휘(李晩輝)의 현달로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건립 경위]

송시열이현응의 숙부 우재(迂齋) 이후원(李厚源)과 외숙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친구 인연으로 이현응과 함께 따르고 보낸 시간이 많아 아들 감사공(監司公) 이만휘 형제의 청으로 비문을 쓰고, 1696년(숙종 22)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

[위치]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에 속해 있다.

[형태]

묘비는 옥개형(屋蓋形) 3면비로 평편한 지붕돌 아래 방형 비신을 장방형 대좌가 받치고 있다.

[금석문]

묘갈 비신 앞면 상단에 ‘증대사헌이공묘비명(贈大司憲李公墓碑銘)’이라고 두전이 새겨있다. 비제는 ‘유명조선국증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사---성균관사행통훈대부---(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司---成均館事行通訓大夫---)’라고 일부 마모된 채 새겨있다. 비문은 □□대광보국숭록대부---중추부사겸영---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손자가 글씨를 썼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김수□(金壽□)가 두전(頭篆)하였다. 입석 연대는 ‘숭정기원후육십팔년월일(崇禎紀元後六十八年月日)’이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1696년(숙종 2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233㎝, 비신 높이 174㎝, 폭 70㎝, 두께 23㎝이다.

비문 내용은 먼저 경성으로 좌천되었다가 돌아와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내용을 기록하고, 인조반정 때 정사원종공신이 되고 관직에 나아가 활동한 행적을 밝히고 있다. 다음 광평대군 후손으로서의 가계와 성품 및 10명의 자녀와 손자들을 밝히고, 광수산 축좌(丑坐) 언덕에 부인과 함께 장례지내고 추증된 내용과 묘비명을 쓰게 된 동기와 명문을 새겨 놓았다.

[현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에 속해 있어, 묘역과 더불어 잘 보전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두전에는 묘비라고 하고, 명문에는 묘갈이라고 하였으며, 사후 40여년 후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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