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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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應成 |
영어공식명칭 | Park Eungseong |
이칭/별칭 | 매헌(梅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박응성 임진왜란 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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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2년 7월 - 박응성 사망 |
거주|이주지 | 박응성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
묘소 | 박응성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오위도총부사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박응성(朴應成)[?~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산 지역을 방어하였다. 김면(金沔)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성주 사원(蛇院)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가계]
박응성의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매헌(梅軒)이다. 아버지는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지낸 박린(朴麟),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할아버지는 봉상시 주부를 지낸 박돈손(朴敦孫), 증조할아버지는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지낸 박사조(朴嗣祖)이며,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광주 안씨(廣州安氏)이다. 박응성 가문은 조부 박돈손의 묘소가 고산(孤山)[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경산에 세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박응성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아들에게 나라에 국록을 받고 있으니, 당연히 보은(報恩)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세 아들 박근(朴瑾)·박장(朴璋)·박헌(朴瓛), 사촌 동생 박응량(朴應良)을 비롯해, 동향의 정변함(鄭變咸)·정변호(鄭變頀)·정변문(鄭變文) 형제와 더불어 경산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박응성은 우선 경산 욱수(旭水)[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 망월산에 자산산성(紫山山城)을 쌓고 왜군을 방어하였다.
이어 6월에는 경상우도의 의병장 김면을 도와 성주성 공략을 도모하기 위해 병력을 낙동강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7월 성주 사원 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세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묘소]
박응성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 비천등(飛天嶝)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응성은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1972년 묘소에 박응성의 묘비[선무원종공신 증 병조참의 밀양박공지묘(宣武原從功臣贈兵曹參議密陽朴公之墓)]가 세워졌는데, 묘비명은 후손 박용진(朴墉鎭)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