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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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王山-抵抗-喊聲竹槍義擧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흥정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하에서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징용 반대 투쟁.
[개설]
1944년 일어난 대왕산 죽창의거(大旺山竹槍義擧)는 ‘경산 결심대(決心隊)의 강제동원 거부투쟁’으로 일컬어지는 경산 지역의 대표 항일 투쟁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많은 젊은이들을 전장터로 끌고 갔다. 그런 가운데 직접적 항쟁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게 되는데, 대왕산 죽창의거도 그 중 하나이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일제 강점기 말 경산 지역 애국 선열의 호국 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제의 징용이 강제되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일제가 패망으로 치닫고 있던 1944년 6월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발발한 징용 반대 투쟁이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군국주의 일본은 소위 ‘15년전쟁’을 수행하였다. 이에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준전시체제(準戰時體制),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체제(戰時體制),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의 비상전시체제(非常戰時體制)로 이행되었다. 이 기간 중 식민지 대륙 침략 전쟁의 병참기지(兵站基地)로서, 폭압적인 지배와 수탈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 국내 항일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전개는 원천적으로 어려워졌다. 1920년대 조직되었던 독립운동·사회운동 단체들은 일제에 의해 대부분 해체·소멸되었고, 1930년대 파쇼적인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거의 모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은 비합법적인 지하운동으로 잠적하였다. 더욱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런 가운데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인적·물적·정신적 수탈을 감행하였다.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과 1939년 7월 8일 실시된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이 수탈의 근거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경기·충청·전라·경상도 지역에서 53,120명을 동원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식민지 통치의 하부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기관을 통해 강제동원을 강요하였다.
[남산면 출신의 청년들이 항거를 계획하다]
1940년대 전시 동원 체제하에 일제의 통제와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비밀 결사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1940년대 비밀 결사의 대표적인 활동은 학생운동이었다. 이러한 비밀 결사 조직은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를 통해서 그들을 지원하는 경우와 일제의 학병·징병·징용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연합국과 일본 제국 간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근로보국대와 지원병 제도로 많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게 되자 징용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1944년 7월 발생한 대왕산 죽창의거는 일제 강점기 말 항일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투쟁이었다.
1944년 6월, 경산의 남산국민학교에는 징용 대상인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곳에 집결한 청년들 중 박재달(朴在達)·성상룡(成相龍)·김인봉(金仁奉, 金仁鳳) 등이 6월 10일부터 수차례의 밀회(密會)를 열고, 일제의 징용을 거부하는 동지들을 규합하며, 항거를 계획하게 된다. 당시 박재달은 “징용(徵用)이나 징병(徵兵)은 누구를 위한 충성(忠誠)이냐? 일제에 충성을 다하며 죽기보다 우리가 주동이 되어 징용징병(徵用徵兵)을 반대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獨立)을 위해 결사적으로 항거(抗擧)하다가 죽는 것이 의롭고 떳떳하지 않느냐?”고 제의하였다. 7월 5일 밤 9시경 박재달·성상룡·김인봉·최동식 등 4인은 남산면 사월리 문용수의 참외밭 원두막에서 항거 장소와 결행 일자를 숙의하였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사월리의 박재달·성상룡·김인봉·최동식과 산양리의 김임방(金任方), 송내리의 김위도(金渭道), 남곡리(南谷里)의 최외문(崔外文) 등 8명의 대표자들이 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동지들은 “만주 등 국외에서 많은 독립 투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맹렬히 일제에 결사 투쟁하고 있으니, 일본은 미구(未久)에 패망하게 될 것이므로 조국의 광복을 되찾고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일깨우기 위해 우리들도 용기를 잃지 말고 동지를 더 많이 규합하자”고 결의하였다. 또한 정보가 누설되면 전원 몰살이므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수차 다짐하였다.
[대왕산에 올라 항거를 시작하다]
7월 15일 밤 9시경 사월·산양·송내·남곡리 출신의 청년 29명이 원당보(元塘湺)에서 최종적인 밀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결사투쟁을 결의하였으며, 대왕산을 항거 장소로 결정하였다. 대왕산을 항거 장소로 추천한 것은 성상룡이었다. 대왕산에는 옛 성터가 있어 항거에 필요한 돌을 쉽게 모을 수 있고, 여러모로 대항에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성상룡은 대왕산 정상에 산신단(山神壇)이 있으니, 거사 때 먼저 산신에 고하여 신의 도움을 받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산신제를 지낼 축문은 성상룡의 부친 성효식에게 부탁하기로 했으며, 제물 일체는 채원준이 맡기로 했다. 이어 죽창과 철창으로 무장하고, 장기투쟁을 위한 식량과 취사도구를 준비하기로 했으며, 각 부락별 입산경로를 결정한 뒤 7월 25일 입산하기로 하였다.
한편, 당시 남산면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박재천은 입산하기 전 친형인 박재달과 함께 일본 경찰의 제반 정보를 최대한 탐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장간에서 쇠창을 만들고, 식량과 각종 전투용품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준비해나갔다. 그러나 원당보의 밀회 광경을 우연히 지나치며 엿들은 사람이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이 일경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대원들은 쇠창 대신 죽창을 만들어 휴대하고 식량도 1주일 정도밖에 준비하지 못한 채 7월 25일 밤 급히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 동틀 무렵 대왕산에 도착하였다.
[결심대를 조직하다]
대왕산에 오른 대원들은 안창률(安昌律)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를 외치고, 경건하게 의거가 성공하기를 축원하였다. 그리고 산신단에 제문을 낭독하고 산신제를 지냈다. 제문의 내용은 “신(神)은 우리 젊은이의 거사를 도우시고 이 제단의 돌이 흙이 됨을 노하지 마소서”였다.
7월 26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행동 요령을 숙의하고, 진용을 3개 소대, 1개 특공대, 1개 정보연락대로 편제하고, 특공대는 남산주재소를 공격·파괴하자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결심대(決心隊)를 편성하였는데, 대장은 안창률, 부대장은 김명돌이었다. 그 외 제1소대장은 성상룡, 제2소대장은 배상연, 제3소대장은 최외분, 특공대장은 최기정, 정보연락대장은 박재달이 각각 맡았다. 그 외 대원은 김인봉·조태식·최순한·박혜광·송수답·최만갑·김홍준·이종태·최동식·박영식·채원준·김득술·최덕조·김경하·김경룡·김위도·김임방·안팔석·이일수·박재천이었다. 규율 및 기강 확립을 위해 헌병대도 설치하였는데, 최태만·조태식·최동한이 맡았다. 대장으로 추대된 안창률은 기독교인으로 국내외 정세를 많이 알고 있었다.
이어 결심대원들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당시 신축 중에 있던 남산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주재소 주석 일본 경찰 요다니[米谷]을 주살할 것을 목표로 한 작전 계획도 세웠다. 막사는 정상에 세웠는데, 제1소대는 평기리 방향, 제2소대는 사림리 방향, 제3소대는 남산면사무소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막사는 소나무 가지 및 솔잎 등으로 위장하여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주위의 커다란 바위를 모아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밤에는 입초와 불침번을 두어 경계를 철저히 하였다.
[일본 경찰과 죽창으로 대치하다]
7월 27일 부일조직(附日組織)인 경방단(慶防團)의 단원들이 대왕산으로 올라와 결심대원을 회유·협박하였으며, 곧이어 남산면과 자인면의 순사 전원과 민간인 30여 명이 올라와 빨리 내려오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대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 수십 명이 올라와 발포하였고, 대원들은 투석전으로 맞섰다. 이에 일제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정찰을 지속하였고, 한편으로 결심대원들의 가족들을 협박하였다.
8월 1일, 다시 일본 경찰과 전투가 벌어져 대왕산 일대에서 대치하였다. 총을 쏘며 올라오는 40여 명의 일본 경찰에 대응하여 대원들은 죽창을 들고 산 아래로 돌을 굴리며 교전하였다. 거의 한 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 경찰은 산 아래로 물러났다.
일본 경찰들을 물리친 대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한없이 외쳤다. 그러나 결심대의 대왕산 주둔지는 이미 노출된 상황이었고, 준비한 식량도 바닥나고 있었다. 이에 결심대원들은 일단 주둔지를 이동시키기로 했다. 8월 2일 결심대의 제1소대는 남곡의 용산, 제2소대는 사림의 조래봉, 제3소대는 양학골 조곡약수정 꼭대기로 이동하였다. 그 뒤 정보연락대와 특공대가 제1소대가 은거하고 있던 용산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기로 하고, 8월 4일 새벽 2시경 용산에서 다시 모였다.
8월 5일 오후 2시경 일경 30여 명이 용산의 주둔지를 공격해왔다. 또 다시 결심대원들은 돌을 굴리며 항거하였고, 일경들은 곧 물러났다. 그러나 식량공급을 담당했던 특공대와 정보연락대가 일경에 발각되어,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였다. 8월 9~10일 굶주림에 지친 결심대원들은 몰래 하산하여 각자의 마을에서 은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8월 10일부터 13일 사이 결심대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심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2~3일 조사를 마친 후, 경산경찰서 유치장에서 50여 일간의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5~6개월 동안 일제의 고문을 다시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안창률과 김경하는 옥사하였고, 박재달과 박재천은 해방 한 달을 앞두고 병보석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항일투쟁의 대미를 장식하다]
결심대의 대왕산 죽창의거는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인력동원 과정에 제동을 걸게 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 제국의회는 이 사건을 거론하며 인력 동원의 어려움을 실토하였다. 이와 관련해 「제85회제국의회설명자료(第85回帝國議會說明資料)」에는 대왕산 죽창의거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노무동원(勞務動員)은 면·읍 직원 내지 경찰관이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곡해하여 그들을 원망하고 폭행·협박하는 등의 사안은 실로 매거하기 어렵다. 최근 보고에 접한 사범(事犯)만으로도 20건을 헤아리는 상태이다. 특히 선반(先般) 충청남도(忠淸南道)에서 발표한 송출(送出) 독려에 경찰관을 살해한 사범 같은 것은 저간의 동향을 잘 말하는 것이며, 특히 주목할 것은 집단기피(集團忌避) 내지 폭행행위로서 경상북도 경산경찰서에서 검거한 불온기도사거(不穩企圖事件) 같은 것은 징용기피를 위해 장정 27명이 결심대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식량·죽·낫 등을 가지고 산정(山頂)에 입롱(入籠)하여 끝까지 목적달성을 기도하고 있던 것으로서 첨예화하는 노동계층(勞動階層)의 동행의 일단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대왕산 죽창의거는 침략 전쟁이 장기화 되는 가운데, 긴급한 인적 동원을 정면으로 거부한 사건이었기에 일제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제의 우려는 설명 자료에서 결심대 대원을 29명이 아니라 27명으로 보고한 데서도 드러난다. 일제는 의거의 파장을 우려해 당시 남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2명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던 것이다.
한편, 검찰의 지침서인 『조선검찰요보(朝鮮檢察要報)』에서는 이 사건을 ‘징용기피를 목적으로 한 집단폭행사건’으로 파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행(素行)이 연극처럼 꾸민 티가 나서 웃어버릴 일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하더라도 무지몽매한 무리는 물론, 일반 민심에 영향을 끼치는 바가 있으니, 비추어 보아 아이들 장난과 닮았다 해서 일소(一笑)에 붙이기 어렵다. 자칫 세상에는 제도하기 어려운 중생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재의 결전 하에 내버려 두기 어려운 일이므로 참고로 제공한 차례로써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고자 한다.”
일제는 대왕산 의거를 일소에 붙여야 할 하찮은 일로 덮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군국주의 일본을 향한 경산 청년들의 대왕산 의거는 그렇게 항일 투쟁의 대미를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