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569
한자 鄭津
이칭/별칭 희절(僖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61년연표보기 - 정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82년 - 정진 낭장으로 벼슬 시작
활동 시기/일시 1391년 - 정진 삭직
활동 시기/일시 1392년 - 정진 연안부사로 복직
활동 시기/일시 1398년 - 정진 삭직, 전라도 수군에 충군
활동 시기/일시 1407년 - 정진 판나주목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0년 - 정진 판한성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5년 - 정진 형조판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27년 3월 6일연표보기 - 정진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봉화(奉化)
대표 관직 낭장|연안부사|판나주목사|판한성부사|형조판서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묘가 있었던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아들로 후광을 받아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자의 난 이후 수군으로 충군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태종 이후 다시 등용되었다.

[가계]

정진의 본관은 봉화(奉化),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습(崔隰)의 딸이다. 1361년(공민왕 16)에 출생하여 1427년(세종 9)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382년(우왕 8) 낭장(郎將)의 벼슬로 시작하여 사재령(司宰令)·전농령(典農令) 등을 지냈다. 1391년 고려를 유지하려는 정몽주(鄭夢周) 등의 세력과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정도전의 세력 갈등 속에서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삭직(削職)되었다가 조선이 개국 된 이후 연안부사로 복직하였다. 태조는 공신의 적자로 내직을 권했으나 본인이 외직을 원하여 연안에 부임했으며, 현지에서 겸손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칭송이 높았다. 그 뒤 경흥부윤과 영원주 목사 등 외직을 돌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와 형조의 전서를 지내고 중추원 부사에 올랐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 정도전이방원(李芳遠)에게 주살당하고 정진도 삭직되어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방원태종으로 즉위한 이후 1407년 풀려나 다시 판나주목사에 기용되었고, 인녕부윤(仁寧府尹)과 충청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1420년 한성부의 수장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의 요직을 거쳐 1423년 공조판서(工曹判書), 1425년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냈다. 1427년 정진이 죽자 세종이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매우 슬퍼하였다.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었다.

[상훈과 추모]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희절(僖節)이라 하였으니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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