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502
한자 王規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937년 - 왕규 후진에 사신으로 감
활동 시기/일시 945년 - 왕규 갑곶에 유배
몰년 시기/일시 945년연표보기 - 왕규 사망
유배|이배지 왕규 유배지 - 갑곶(甲串)
성격 문인|관료
성별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 대광(大匡)

[정의]

고려 전기에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포함한 경기도 광주(廣州) 지역을 세거지로 했던 호족.

[가계]

왕규의 가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왕규의 두 딸이 태조 왕건(王建)의 제15비(妃)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과 제16비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이 되어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소광주원부인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또한 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그의 또 다른 딸이 혜종의 두 번째 부인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이 되어 딸 셋을 모두 왕에게 시집보냈다.

[활동 사항]

오늘날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포함한 경기도 광주(廣州)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태조 왕건(王建)을 받들어 대광(大匡)에 올랐다. 태조의 장인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937년(태종 20)에는 후진(後晋)에 등극 축하 사신으로 다녀왔다. 943년(태조 26)에는 염상(廉相)·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옆에서 지켰으며, 태조가 죽자 그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제2대 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소광주원부인이 낳은 아들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혜종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혜종이 병으로 죽은 후 그의 동생 요(堯)는 서경의 왕식렴(王式廉) 군대를 끌어들여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 보냈다가 945년(혜종 2) 9월 사람을 보내어 죽이고 아울러 그의 일당 300여명도 처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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