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운 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438
한자 柳雲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각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85년 - 유운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28년 - 유운 사망
조성 시기/일시 조선 중기
원소재재 광주군 언주면
성격 능묘
관련 인물 유운|남곤|조광조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었던 조선시대 문신 유운(柳雲)의 무덤.

[개설]

유운[1485~1528]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종룡(從龍), 호는 항재(恒齋)·성재(醒齋)이며, 사지(司紙) 유공좌(柳公佐)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514년(중종 9)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에 들어갔다.

151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들과 술만 마신다고 하여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이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남곤(南袞)에 의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남곤 일파에게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대간들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전하께서 다시 조광조(趙光祖)를 써서 임금과 신하가 옛날과 같으면 신 등이 마땅히 직에 나아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청컨대 신들을 죽여서 간인(奸人)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조광조를 구원하고자 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리하여 훈구계(勳舊系)에 의해 사림파(士林派)로 인식되었고 후대의 사림파로부터 동류로 인정받았다. 그 뒤 향리에 묻혀 술로 울분을 달래다 죽었다. 시풍이 호탕하여 한때 명성이 높았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인간의 처세에 필요한 필수적인 규범을 정리한 『진수해범(進修楷範)』 2권 2책을 편저하였다. 이 책은 1514년(중종 14) 옛 경전과 역사서 및 제가(諸家)의 설을 섭렵하여 덕을 쌓는 학업에 도움이 되는 문구를 뽑아 간행한 것이다.

[위치]

오늘날 강남구에 해당되는 광주군 언주면에 있었다.

[현황]

조선 중기 인물로 기록상 무덤이 있었던 것이 확인될 뿐, 묘의 실존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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