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301
한자 先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선사/선사
집필자 이우태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에서 문자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

[개설]

강남구 지역은 지금은 도시화가 많이 진전되어 선사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전의 보고서나 기록들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선사 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남구 지역의 대표적인 선사 시대 유물의 분포지로는 율현동, 압구정동, 개포동, 역삼동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율현동에는 석기의 산포지가 보고된 바 있고 압구정동한강변인 옥곡(玉谷)마을에서는 돌도끼가 출토되었다고 하나 모두 학술적 조사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서 유적의 성격이나 시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신석기 시대]

인근 암사동과 미사리 등지의 신석기 유적지로 보아 강남구의 한강변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가 산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서울 지역을 대표할 만한 것들이 보고되고 있다. 우선 개포동 지역에서는 4기의 고인돌이 분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7년 당시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을 조사한 이병도의 보고에 의하면, 속칭 ‘고인고개’라고 불리는 서쪽 솔밭에 지석 4기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크기의 순서대로 편의상 A, B, C, D로 구분하였는데 가장 큰 지석A는 기둥돌 하나가 도괴되어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편마암으로 된 개석은 네 변의 길이가 일정치 않은 방형으로 남북이 3.6m 동서의 가장 넓은 곳이 3.75m 이고 두께는 85㎝ 정도였다고 한다. 지석B는 A의 서남쪽 24.5m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형태와 크기는 A와 비슷하여 남북이 3.4m, 동서가 3.6m, 두께는 35㎝ 정도이다. 지석A에서 서북쪽으로 22.6m되는 언덕에 놓여 있는 지석C와 이 지석C의 동남쪽 6.8m 지점에 위치한 지석D의 개석들은 모두 평평하나 지석들은 거의 땅속에 묻힌 상태로 하나씩 만이 노출된 상황이었는데, 지석C의 크기는 남북 2.45m, 동서 2.49m이고 두께는 45㎝이며, 지석D는 남북 2.8m, 동서 2.05m, 두께는 45㎝ 정도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들 4기의 고인돌은 형태로 보아 모두 기반식(基盤式) 고인돌로 판단된다. 지금은 그 형태는 물론 원위치조차 확인할 수 없지만, 서울시내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매우 의미있는 유적이라 할 것이다.

강남구 지역의 대표적인 선사 유적으로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있다. 지금은 강남구 도곡동 542-2이지만, 처음 발견 당시의 행정구역은 역삼동 산21-1이었으므로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라 불린다.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경부고속도로 동측, 청계산과 우면산 사이를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는 양재천변의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민무늬토기 시대의 주거 유적지이다. 해발 약 90m의 야산 사면에 있으며 한강으로부터의 거리는 약 3㎞가 된다. 1966년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유구는 비록 집터 1기에 불과하지만 집터의 길이가 16m, 너비가 3m, 깊이가 50~70㎝로 실내면적이 약 48㎡[12평]에 이르는 대형으로 발견 당시에는 남한 최대의 장방형집터였다. 선사 시대의 주거지에서 대체로 성인 1인의 점유 면적은 5㎡ 정도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약 10명의 가족원으로 구성되는 확대 세대용이라고 추측되며, 그것은 적어도 3쌍의 부부를 포함하는 가부장적 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집터는 화재를 당해 일시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둥은 구덩이의 벽면을 따라 1m 간격으로 지름 10~15㎝ 내외의 기둥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에는 기둥이 불탄 채 숯 기둥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제1열 기둥의 목재는 참나무기둥이었으며, 기둥이 수직으로 직립한 형태인 것으로 보아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태였다고 추측된다. 화덕자리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출입구는 남쪽 벽면 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돌도끼 3점, 돌끌 2점, 돌화살촉 3점, 숫돌 6점, 갈돌 1점 등 많은 간석기류가 있었는데, 돌도끼는 대개 길이 12~13cm 정도의 크기였고, 돌화살촉 3점 중 1점은 유경식(有莖式)으로 인근의 가락동이나 명일동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형태였다. 출토된 토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민무늬토기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간토기이다. 민무늬토기의 재질과 형태는 다르더라도 대부분 입술부분에 일직선으로 구멍을 새긴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였다. 붉은간토기는 동체부 이상의 부분이 남아 있는데, 적은 항아리 모양이며 운모가 섞인 태토에 외면에는 단액(丹液)을 발라 잘 연마한 것이다.

이들 유물들의 출토 상황이나 인근의 유적들과의 관련 등을 고려해 볼 때 유적의 연대는 옥석리·교하리·미사리 등과 비슷한 시기인 BC 7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주거구조뿐만 아니라 민무늬토기문화의 편년을 밝히는 데 기초적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청동기 시대 유적의 의의]

서울특별시 지역의 청동기 시대 유적지는 신석기 시대에 비해서 그 숫자가 급증하고 있으며 암사동과 경부고속도로 사이의 잠실, 영동지구 일대에 동쪽으로부터 고덕동, 명일동, 방이동, 가락동, 문정동, 논현동, 역삼동, 반포동 등에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강북에도 구의동, 망우동, 상봉동, 응봉동 등지의 유물 발견지가 있으며 서울 중심 지구에도 원래는 많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 유적들은 파괴되어서 유물만이 지표에서 채집된 것도 있고 또 청동기 시대라고는 하나 주거지에서 청동기가 발견된 예는 없어 정확한 편년을 설정하기는 힘들지만, 서울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 중에서는 역삼동과 가락동의 그것이 대체로 전기에 해당하고, 명일동의 것이 후기라고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서울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는 그 이전 시기인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가 주로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훨씬 내륙 쪽으로 이동하고 또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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