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019
한자 江南-開發以前-鴨鷗亭洞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창모

[개설]

압구정동은 조선시대 권신이었던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에서 위치했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경교명승첩에 보이는 압구정동]

압구정동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시대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속에 있다. 1741년(영조 17년)에 비단 위에 그려진 31×20㎝ 크기의 그림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장에 따르면 지금의 잠실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본 시각이기 때문에 압구정동 일대와 그 맞은편인 옥수동 금호동 일대가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림 속의 압구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으며, 압구정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규모 있는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림에는 압구정이 위치한 언덕 앞에 또 하나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 위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마을은 옥곡에 면한 언덕배기 위의 마을이다. 두 언덕 아래로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강남의 개발과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한강을 종합 개발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장면이다.

[지도로 본 압구정동]

압구정을 처음 지은 사람은 한명회[1415~1485]이다. 세조의 최측근으로 권신이 된 한명회가 은퇴 후에 갈매기와 벗 삼아 지내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금릉위 박영효의 소유였으나, 박영효가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되면서 몰수되어 파괴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의 영역 밖이었던 압구정 일대가 서울에 편입된 것은 1963년 1월 1일 강남 일원이 서울에 편입되면서다.

1921년 지도에 압구정리로 표시된 지역을 살펴보면, 압구정이 있던 곳 앞에 또 하나의 언덕이 있었으며 그곳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곳이 수해로부터 안전한 구릉지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겸재의 그림에 나오는 지형과 물길의 흔적은 1957년 육군측지대에서 작성한 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압구정 동편으로 작은 개천이 2개 보인다. 이 물길은 압구정동의 동남측에 있었던 청담리가 위치한 언덕 서쪽에서 발원한 물길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형성된 곳이다.

1957년 지도에서 압구정의 위치는 지도에서 보이는 구릉의 정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위치는 올림픽대로 북측과 지금의 성수대교 남측 인터체인지 서측이 된다. [최완수 선생은 압구정의 위치를 압구정동 310번지로 추정했지만 지도를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성수대교 남단 근처가 맞다.]

나아가 겸재의 그림에서 나오는 압구정을 앞으로 한강으로 합류되는 작은 물길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이 물길은 학리와 청담리가 위치한 구릉 사이에서 발원하여 계곡을 따라 흐르다 압구정 동측에서 한강에 합류하고 있다.

지도에서 보면 압구정이 위치한 언덕의 서측과 압구정 동쪽에 위치한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부분 역시 겸재의 그림과도 일치한다. 겸재의 그림 앞으로[동측] 일군의 집들이 보이는데 이들 집은 구릉지에 조성된 것이다. 겸재의 그림에 나오는 압구정 바로 앞의 기와집은 일반 민가가 아니라 압구정의 소유주가 거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명회가 거처했던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선말에 박영효가 한 때 소유했던 곳일 것이다. 1957년 지도에 따르면 언덕 아래의 물길과 주변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러한 압구정 일원의 모습은 조선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남개발과 함께 사라진 압구정동의 옛모습]

압구정동의 변화는 강남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도성은 한강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에 매년 반복되는 물난리로부터 안전했고, 도성에서 한강에 이르는 성 아래 십리에는 금산제도가 실시되어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쉬운 지역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구릉지 몇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겸재 정선에 나타난 압구정동 일대의 풍경은 1970년대 강남개발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압구정의 첫 번째 변화는 한강변에 건설된 강변도로에서 시작되었다. 강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매년 반복되는 홍수 피해를 막는 것이 필요했고, 이는 곧 한강변 제방 건설로 이어졌다.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건설된 제방위에 건설된 도로가 강변도로였다. 1971년 8월 15일에 개통된 제1한강교에서 압구정동에 이르는 강변5로와 압구정동에서 천호동에 이르는 강변6로 구간이 건설되면서 해마다 반복되던 강남의 홍수피해가 사라지고 영동지구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 때 압구정이 위치했던 구릉이 사라지고, 저습지는 매립되고, 제방 안쪽에 위치한 공유수면도 매립되었다. 1968년 현대건설에서 52,920평에 대한 매립허가를 받았고, 이 부지에 오늘날 강남 아파트의 대명사가 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토석이 필요했고, 인근에서 토석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언덕을 깎았고, 압구정동 건너편에서 중량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곳에 위치했던 저자도가 파헤쳐져 압구정동 매립공사에 사용되었다. 영동대교에서 성수대교한남대교에 이르는 지역이 오늘과 같은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것은 1976년 서울시가 강남 지역에 대한 토지투기를 막고 아파트 건축을 장려하기 위해 이 지역 50만 평[1652892.56㎡]을 아파트만 지을 수 있는 아파트지구로 지정하면서 부터이다.

한편,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는 한 때 제2잠수교로 건설될 계획이었으나 착공 후 계획이 변경되어 오늘과 같은 여느 한강 다리와 같은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동시에 압구정이 위치했던 언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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