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002
한자 朝鮮時代-佛敎-奉恩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호선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불교.

[조선 전기 억불정책과 불교의 존립 위기]

고려 말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은 고려의 폐단을 개혁하는 일환으로 불교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찰경제의 비대화와 승려의 윤리적 해이 등 불교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비판하며 불교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색(李穡)[1328~1396]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고려의 국가·사회에서의 불교의 역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교가 야기하고 있는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이후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교리 자체를 비판·부정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불교는 정치에도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인륜을 부정하고 허망한 설로 사람들을 속이는 이단이므로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입장, 즉 ‘척불(斥佛)’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 일파와 배불 혹은 척불의 입장에 있던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개창하게 되면서 척불은 조선의 기본정책이자 사대부의 명분이 되었다. 조선 전기 태조세조 등 일부 불교에 호의적인 국왕이 있었고, 민심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전통적 신앙이 된 불교를 한 번에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전기 척불은 국가의 지향점이 되어 단계적으로 불교를 축소시켜 나갔고 중종 대가 되면 사실상 폐불에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불교에 대한 통제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태조는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했는데, 고려 말부터 시행된 이 제도로 인해 출가하여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부담을 져야 했고 조선 건국 후 도첩제는 더욱 강화되어 승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태조는 불교에 대한 특권을 제한하고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불교의식을 폐지하는 등 불교에 대한 규제를 실시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하였다. 태조 대는 문물제도가 완전히 새롭게 정비되지 못하고 전조(前朝)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던 상황이었으므로 고려의 전통대로 무학 자초(無學自超)[1327~1405]와 조구(祖丘)를 각각 왕사와 국사에 임명하기도 했다. 자초조구는 조선의 마지막 왕사와 국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 성리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했던 태종이 즉위하면서 불교개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406년(태종 6) 국가에서 정한 사원 외에 나머지 사찰에 속한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는데, 이 조처로 사원전(寺院田) 3~4만결, 노비 8만명이 몰수되고 11종, 242사의 사찰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다시 7개의 종단으로 수를 줄였다.

세종태종 대의 불교정책 기조를 계승하여 1424년(세종 6)에는 7개의 종단을 다시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통합하고 선교 각각 18개씩 36개의 사찰만 공인하여 공인사찰의 수를 대폭 줄였다. 이에 따라 공식 사원전의 결수와 승려의 수도 대폭 줄었으며, 양종 통합으로 승과(僧科) 정원이 감소되고 시험과목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래 불교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불교 자체 기관인 도회소(都會所)를 두었다. 선종 도회소는 흥천사(興天寺), 교종 도회소는 흥덕사(興德寺)를 지정하여 각 종단의 업무를 따로 관장하게 했는데, 승록사 폐지와 도회소 설치는 불교를 더 이상 국가의 공적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내불당(內佛堂)을 폐지하고 양종 사찰을 제외한 도성 내 절이 철폐되었고 승려의 도성 출입도 제한하였다.

이처럼 태종세종 대를 거치는 동안 조선은 억불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불교에 대한 제한조처들을 추진하였으나 세조의 즉위로 불교에 대한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세조는 기존의 척불정책을 추진하지 않는 대신 사원전을 확대하고 수조권을 보장하는 등 친불정책을 폈다. 전국의 많은 사찰이 중창, 보수 되었고 이미 출가한 자에 대해서는 도첩(度牒)의 유무를 살피지 않았다. 또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전(佛典)을 언해하여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조 대의 이러한 정책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세조 사후 억불정책이 강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성종대 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사림들은 불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억압정책을 펼칠 것을 주장하며 사찰을 모두 없애고 승려를 전부 환속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완전한 혁파는 유보되었다. 그러나 도첩 발급이 중단됨으로써 승려가 될 수 있는 공식적인 길이 사라졌고, 승려들을 환속하여 군역에 충당했으며 도성 안의 염불소를 철폐하고 간경도감을 폐지하였다. 한편 세조대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초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도승법, 양종 및 승과 시험규정, 사찰의 신규창건 금지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나 불교를 공식화하고자 했던 세조의 의도와는 다른 것으로 불교에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조선 전기 지속적으로 전개된 억불정책은 연산군 대와 중종 대를 거치며 폐불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연산군 후반 파행정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산군은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고자 하였으며 선교 양종의 승과를 혁파하였다. 이러한 폐불은 원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연산군대 폭정의 결과물이었으나 불교계는 존립기반을 상당부분 상실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경국대전』의 도승조(度僧條)를 삭제함으로써 승려의 자격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공식적인 폐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승려들은 도첩 대신 호패를 받았고 환속이 요구되었다.

[왕실의 원찰운영과 봉은사]

조선 전기 지속적으로 진행된 척불의 흐름 속에서도 왕실에서의 숭불은 계속되었다. 국가적인 불교정책 시행이라는 공적인 영역과 왕실의 신앙이라는 사적 영역이 구분되었던 것인데, 왕실 숭불의 정황도 국왕의 불교에 대한 성향이나 사안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억불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다. 신덕 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1396]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서울에 흥천사를 창건했고 고려 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을 사경하고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기도 했으며 조선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사와 국사를 임명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불교교단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던 태종의 경우도 국가에서 설행하는 불사는 중단했으나 왕실불교행사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태조와 관련된 불사는 막지 않아 태조 사후 재궁(齋宮)으로 개경사(開慶寺)를 세우고 태조의 원찰인 흥덕사 창건을 돕기도 했다. 선교양종으로 불교교단을 축소하며 억불정책을 펼쳤던 세종의 경우도 후반기로 가면서 불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흥천사 사리각(舍利閣)을 중수하는 등 각종 불사를 행했고 혁파된 내불당(內佛堂)을 다시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불교신앙은 주로 망자 천도(薦度)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었고, 왕실 능묘 근처에는 능묘를 관리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대개 왕의 묵인하에 왕비나 대비, 왕자와 공주 등 왕실 구성원의 후원으로 왕실의 숭불이 존속되었다. 세종의 형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효령 대군(孝寧大君)이나 세종의 아들인 안평 대군(安平大君)과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종대 왕실관련 불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기왕의 억불정책을 폐기하고 불교교단을 후원했던 세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호불(好佛) 군주로 수많은 불사를 벌여 여러 사찰을 중수하고 토지를 기부하였으며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었다. 간경도감에서 불전을 대대적으로 간행하였으며 서울 흥복사(興福寺) 터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웠다. 성종 대에도 왕실관련 사찰은 특별히 보호되었고, “폐불”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연산군중종 대에도 왕실의 숭불은 계속되었다.

특히 능침사찰인 봉은사의 중창이 주목되는데,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성종의 능이 정해지면서 선릉 주변을 정비하느라 민가를 헐어낼 때 성종의 비 정현 왕후(貞顯王后)가 중심이 되어 선릉 인근에 있던 견성사(見性寺)는 그대로 두게 하였다. 그리고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릉 가까이 있던 견성사를 왕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확장하여 중창하였는데, 1499년 공사가 끝나자 봉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왕실에서는 봉은사에 전세(田稅)를 내려주거나 전답문서를 주었고, 봉은사는 왕릉 추복사찰이자 선왕의 제사를 지내는 능침사의 기능을 순조롭게 이행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 나갔다.

[봉은사 중창과 양종회복]

선릉의 능침사찰인 봉은사가 선종 수사찰(首寺刹)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명종문정 왕후(文定王后)의 후원과 보우(普雨)의 활동에 기인하였다. 선릉의 능침사찰인 봉은사는 광릉(光陵)의 능침사인 봉선사(奉先寺)와 함께 중종대 이미 중심사찰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 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불교가 일시적으로 부활하면서 봉은사는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1548년(명종 3) 문정 왕후의 요청에 따라 보우봉은사 주지직을 맡게 되었고, 1550년(명종 5) 문정 왕후는 선교양종을 복립하고 『경국대전』의 승과와 도승조를 다시 거행토록 하였다. 문정 왕후는 영의정 상진(尙震)에 내린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경국대전 체제로 돌아감으로써 잡승(雜僧)을 금하고, 승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엄격히 하여 승도의 증가로 인한 폐단을 최소화 하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세웠다. 선교양종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이 되고 봉선사는 교종 수사찰이 되어 불교계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하였고, 1551년(명종 6) 보우를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 주지(判禪宗事 都大禪師 奉恩寺 住持)로, 수진(守眞)을 판교종사 도대사 봉선사 주지(判敎宗事 都大師 奉先寺 住持)로 임명하여 선교양종을 관장하게 하였다.

1552년(명종 7)에는 승과가 실시되었는데 선종과 교종은 각각 수사찰인 봉은사와 봉선사에서 시행되었다. 선종은 봉은사 앞 들판 승과평(僧科坪)에서 보우의 주관하에 이루어져 400명의 예비합격자와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했는데, 이 33명 중에는 훗날 의승군으로 유명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도 있었다. 1555년(명종 10) 두 번째 승과를 주관하고 보우봉은사 주지직과 선종판사를 그만두고 청평사(淸平寺)로 은퇴했다가 1560년(명종 15) 다시 봉은사 주지직을 맡았고 1562년 시행한 승과에서는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이 합격하였다.

1562년(명종 17) 봉은사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해 9월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정릉(靖陵)이 천장되면서 봉은사는 현재의 위치로 대규모로 확장 이건되었는데, 당시의 웅장한 규모는 경산제찰(京山諸刹) 중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1563년(명종 18)에는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사패를 봉안하기 위한 강선전(降仙殿)이 봉은사에 세워졌다. 봉은사에는 전부터 역대 왕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어선루(御宣樓)가 있었는데, 강선전이 건립되면서 봉은사는 왕릉 수호사찰이자 선왕 위패 봉안사찰이면서 세자의 위패가 봉안된 곳으로 왕실사찰 가운데서도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게 되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 왕후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보우는 탄핵을 받아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선교 양종과 승과도 폐지되었다. 문정 왕후의 불교 우대 정책과 보우의 활동은 선교양종을 복립하던 당시부터 줄곧 언관(言官)과 유생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혔었고, 불교에 대한 비판은 보우봉은사로 집중되었다. 선릉의 능침사가 되어 1499년 봉은사라는 명칭을 하사받은 이후 조선 전기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자 불교계를 이끌어 나가는 명실공히 수사찰의 기능을 하던 봉은사의 형세와 위상도 침체기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문정 왕후의 승하로 인해 불교는 다시 폐불의 단계로 접어들었으나 이 시기 승과를 통해 배출된 승려들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초석이 되었다.

[의승군(儀僧軍)의 활동과 조선 후기 불교의 전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사람을 보내 묘향산에 있던 청허 휴정을 불러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선조휴정에게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여 승군 동원과 통솔을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황해도에서는 휴정의 제자 의엄(義嚴)이 총섭(總攝)이 되었고 관동(關東)의 사명 유정, 호남의 뇌묵 처영(雷黙處英) 등 각지의 승장들이 승군을 이끌고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또한 승군은 서울로 돌아오는 선조를 호위하기도 했고 군량 보급, 산성 축조와 수호 등을 담당하였다. 휴정의 수제자로 임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승려로 명성을 떨친 유정은 강원도에서 800명의 승병을 모은 뒤 휴정을 대신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고 산성축조와 군량조달 등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본군과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정을 대표하여 파견되었고 정세를 분석하여 대비책을 주달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재개 문제나 포로쇄환 등 외교적 문제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임란 당시 의엄, 유정, 처영 등 다수의 휴정의 문도들이 승장으로 활동했는데, 휴정유정명종대 양종이 일시 복립될 당시 봉은사에서 개최된 승과에서 급제한 이들이 이때 많은 활약을 했다는 사실은 봉은사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불교사 이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임진왜란휴정의 지휘아래 승려들이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승군을 일으킨 공적은 이후 조정에서 불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조선 후기 불교가 존립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명종문정 왕후에 의해 일시적으로 선교양종이 복립되고 승과가 실시되면서 보우가 주된 활동지로 삼았던 봉은사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승장들을 배출한 곳이었으며 조선 후기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때의 경험은 이후 축성 뿐만 아니라 궁궐 조영, 산릉(山陵)과 제언(堤堰) 조성 등에 승려를 동원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조선 후기 승려 노동력을 활용하고 그 반대급부로 승려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전쟁의 와중에 봉은사도 피해를 입었으나 1612년(광해군 4) 왕명으로 봉은사에 주석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 벽암(碧巖) 각성(覺性)[1575~1660]에 의해 사찰이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암 각성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화엄사 등 대찰들을 중창하였는데, 이때 봉은사도 함께 중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봉은사는 당우 몇 칸만 남기고 전소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경림(敬林)을 중심으로 사찰을 중창하여 옛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1665년(현종 6) 다시 사찰의 일부가 손실되었고 절의 중창 중수는 이후 계속되었다.

1700년경 월저 도안(月渚道安)[1638~1715]은 법당의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권선문(勸善文)을 썼고, 1765년(영조 41)에는 영파 성규(影波聖奎)[1728~1812]가 봉은사 판사선생안(判事先生案)을 새로 정리했는데, 삼세여래의 개금불사도 이때 이루어졌다. 1777년(정조 원년)에는 삼장탱, 시왕탱, 사자상을 조성하고 석가상과 미타불상을 개금했다.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가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5규정소(糾正所)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1856년(철종 7)에는 남호 영기(南湖永奇)[1820~1872]의 주도 아래 왕실의 내탕금과 중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華嚴經)』 80권 등 불서를 간행하고 3,479판에 이르는 경판을 보관할 판전(板殿)을 지었다. 이는 봉은사를 중심으로 당시 불교교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19세기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던 초의 의순(草衣意恂)이 『화엄경』 경판 간행에 증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당대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판전 현판을 써 걸었다.

조선 전기 억불정책 속에서 왕릉의 능침사로 출발한 봉은사명종 대를 거치면서 선종을 이끄는 선종 수사찰로 거듭났고, 명종 대의 선교재건과 승과시행 등은 임란과 호란에서 의승군의 활약으로 결실을 거두면서 조선 후기 불교가 존속하게 되는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봉은사는 왕실 원찰이자 선종을 이끄는 선종 수사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며 조선 시대 불교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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