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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1952
한자 宣靖陵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81년 - 이익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63년 - 이익 사망
성격 한문산문
작가 이익(李瀷)[1681~1763]

[정의]

조선 후기 이익선정릉임진왜란 때 훼손되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원통함을 표현한 글.

[개설]

「선정릉」이익(李瀷)[1681~1763]의 문집 『성호사설(星湖僿說)』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선정릉은 조선조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宣陵)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다. 이 두 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되어 시신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고 하는데, 이익은 전란 때 능침(陵寢)이 훼손된 일을 떠올리며 그 원통함을 글로 남겼다.

[구성]

「선정릉」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훼손된 일을 떠올리며 그 원통함을 표현하였다. 끝에는 윤안성(尹安性)이 일본으로 가는 회답사(回答使)에게 지어준 시가 소개되어 있다.

[내용]

임진(壬辰)에 당한 양릉(兩陵)의 변고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원수이다. 옥체(玉體)의 진위(眞僞)조차 지금까지 불명(不明)의 안(案)으로 되어 있는 것이나, 왜놈들이 이미 발굴하고서 다시 먼 곳의 시체를 구해다가 광중에 두었다는 것도 역시 그럴 리가 없을 듯하다. 발굴한 것이 사사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화를 얻고자 한 짓인데, 반드시 진(眞)은 숨겨 버리고 가시(假屍)로 바꿀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아 ! 말했댔자 무익할 따름이다. 그 후에 일본에서 능을 침범한 도둑 두 놈을 잡아 보냈는데, 그중 한 놈은 나이 젊어서 임진년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단정할 수 있었으니, 그는 반드시 사형수를 보내서 우리를 속인 것이다. 그들의 사형수를 우리에게 넘겨 형을 집행하게 했다면, 그 치욕(恥辱)이 더욱 심한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라면 마땅히 왜놈과 더불어 함께 앉아 심문하여, 자복하면 베고 불복하면 제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는 아마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후 일본으로 회답사(回答使)가 가는데, 윤안성(尹安性)이 시를 지어 주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사명회답향하지(使名回答向何之)[회답 사신은 어디로 가는건가]

금일교린아부지(今日交隣我不知)[오늘날 화친이란 내 그 뜻 모를레라]

군거한강강상망(君去漢江江上望)[한강 위로 가거들랑 자네 좀 바라보게]

이릉송백불생지(二陵松柏不生枝)[두 능침 송백나무 가지가 있나 없나]

[특징]

「선정릉」선정릉임진왜란 때 훼손된 일을 떠올리며 비분강개한 심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선릉과 정릉이 도굴되어 시신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일은 이후 여러 문인들에 의해 통탄할 사건으로 거론되었다. 일본이 능을 침범한 도둑으로 보낸 두 사람은 임진년의 도둑이 아니고 조선을 속이기 위해 보낸 사형수였을 터인데 그 당시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을 애석해 하였다. 끝에 윤안성이 일본으로 가는 회답사에게 지어 준 한시를 덧붙임으로써 통탄의 심정을 더욱 부각시켰다.

[참고문헌]
  • 한국고전종합DB(http://www.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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