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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450
한자 沙平場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각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조선 후기 - 사평장터 건립
폐지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사평장터 폐지
소재지 사평장터 - 강남구 신사동지도보기
성격 장터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던 조선 후기 사평나루 사평원 근처에 설치되었던 장터.

[개설]

16세기 경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던 장시[향시]는 계속 증가하여 19세기 전반 순조 때에는 전국의 장시가 1,061개소를 헤아렸고, 경기에만 102개소가 되었다. 당시 광주부의 장시는 성내 2일장, 경안 3일장, 세피천·덕풍 4일장, 송파 5일장, 사평 2일장, 낙생 3일장, 곤지암 4일장, 팔곡 5일장 등 9개 처가 있었다. 이중 사평장사평나루를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였다. 아울러 사평장은 당시 가장 컸던 송파장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삼남지방의 물산이 서울에 모이는 중요 교통로에 있어 장시가 발달할 수 있었고, 특히 조운과 나루 역할을 하는 곳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입지조건이 상업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곳 상인들은 도성 안의 사상도고(私商都賈)들과 일정한 결합관계를 가지며 국내 상업활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였다. 사평장과 송파장의 상권은 향시로서의 성격과 도성으로 상품이 반입되는 최종 집적지로서의 성격이 결합되어 서울지방 사상도고의 대자본 영향아래에 있었다. 서울의 사상도고들은 서울을 둘러싸고 발달한 그 주변 상업중심지인 경강변과 송파·누원점·송우점 등을 그들의 활동지로 확보하였는데, 사평장 또한 그에 속하였다. 당시 광주부의 사평 상인들은 인근의 광나루·누원 상인들과 더불어 송파상권을 이루어 각종 물화를 모아 장시를 크게 열고, 삼남 및 동북의 상인들을 유인하여 자의로 매점매석을 하기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평원 인근에 장시가 열려 사평장(沙平場)은 상업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인근의 송파장과 더불어 전국 15대 향시에 속하게 되었다. 장시에서 매매된 상품은 곡물, 상업적 농업작물, 수공업 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장시가 발전하면서 점차 상설시장화 되어 갔다. 그러나 1925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번창하던 사평장은 삽시간에 텅빈 모래벌로 변하였다. 주민들은 다시 새말을 형성하였는데 6·25 전쟁 후 반농반상업의 마을로 변하였다가 농업위주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1960대 이후 서울로의 행정구역 편입과 한강 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강변도로와 둔치공원으로 변하였다.

[위치]

사평장은 지금의 한남대교 남단 신사중학교 일대로 추정되는 사평원 인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동쪽으로 광주부 중대면 송파장으로 이어지고, 한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 마포 경강상인들과 이어지는 중요한 상권을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 금난전권을 행사하던 시전상인에 대신하여 사상도고의 발달과 궤를 같이하여 상업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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