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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제 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441
한자 南泰齊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각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99년 - 남태제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76년 - 남태제 사망
원소재재 남태제 묘 - 광주군 언주면
성격 능묘
관련 인물 남태제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었던 조선시대 남태제(南泰齊)의 무덤.

[개설]

남태제의 시호는 청헌(淸獻),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진(元鎭)·관보(觀甫)이며, 호는 담정(澹亭)·학야(鶴野)다. 아버지는 공조좌랑 남필명(南弼明), 어머니는 한성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 『숙종실록』의 보궐정오(補闕正誤) 편찬에 참여했다. 그 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죄인 국문 등에 신속히 대처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뒤 전적·예조좌랑·지평·병조좌랑 등을 거쳐, 1734년 정언에 이르러 당시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진도군수로 좌천되었다. 뒤에 공조참판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35년 장악원첨정을 시작으로 필선·장령·정언·지제교·헌납·집의·수찬·교리 등의 대간(臺諫)을 두루 역임했다. 당시 기강퇴폐, 재용 낭비, 풍속 문란,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논쟁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다.

1743년(영조 19) 병조참의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강화 유수·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윤·대사헌·대사성·개성 유수를 역임했다. 1755년 소북(小北)의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신하로서 잘못된 의리를 가진 것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760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돈녕부사·한성판윤·내의원제조를 역임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형조판서·예조판서·경기감사·홍문관제학을 거친 뒤, 1767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이 70세가 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잘 지켜 관직 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서(詩書)와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 저서로 『담정유고(澹亭遺稿)』가 있다.

[위치]

오늘날 강남구에 해당되는 광주군 언주면에 있었다.

[현황]

조선 전기 인물로 기록상 무덤이 있었던 것이 확인될 뿐, 실존은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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