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404
한자 驛三洞靑銅期時代住居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물 산포지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산21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나각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기/시대 기원전 6~7세기로 추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연표보기
소재지 역삼동 집자리 -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발굴 당시 역삼동]지도보기
성격 집자리
면적 길이 16m, 너비 3m, 깊이 50~60㎝ 크기의 장방형 수혈식 집자리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발굴 당시 역삼동]에 있던 청동기 시대 집자리.

[개설]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한강 유역에 벼농사가 시작된 뒤의 전형적인 집자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한강 지류의 하나인 양재천강남구 도곡동의 표고 90m의 매봉산 구릉 위에 위치한 민무늬 토기 시대의 주거지로 1966년 숭실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일대는 표고 100m 내외의 매봉 야산 줄기가 이리저리 뻗은 준평원으로 유적지에서 전방 약 10㎞에는 표고 544m의 청계산이, 동남방으로는 표고 306m의 구룡산이, 서쪽으로는 표고 293m의 우면산이 바라보이며, 북쪽으로는 3㎞ 거리에 한강 넘어 남산과 북한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유적이 위치한 구릉은 청계산과 우면산 사이를 흘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양재천을 끼고 있다.

이 주거지는 길이 16m, 너비 3m, 깊이 50~60㎝ 크기의 장방형 수혈식 주거지이다. 수혈 벽을 따라서 직경 10~15㎝, 깊이 10㎝ 내외의 기둥구멍이 1~2m 간격으로 있었으며 그 중에는 참나무 기둥이 불탄 채 숯 기둥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혈 중간 부분에서는 기둥 구멍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화덕 자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주지의 실내 면적은 약 12평[약 48㎡]으로 현대의 15~16평 가옥에 해당되어,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2~3세대의 연립형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생활 도구의 양으로 보아도 15~16명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재로 인하여 유물이 원위치에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 조사되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발굴 유물은 석기로 돌도끼 3점, 돌끌 2점, 돌화살촉 3점, 반월형 돌칼[미완성품] 1점, 숫돌 6점, 연석 등 20여 점과 토기로 복원이 가능한 심발형 공렬 민무늬 토기와 호형 민무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반월형 돌칼은 청동기 시대 농경 문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이다. 토기는 이 유적을 대표하는 민무늬 토기와 붉은간토기[紅陶]가 발굴되었는데 복원된 기형을 보면 옹형(甕形)과 호형(壺形)의 두 형태이다.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연대는 기원전 6~7세기로 추정된다. 가락동 주거지 보다는 약간 후대에 속하며, 명일동·수석리·아차산 주거지보다는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일반적인 민무늬 토기인의 주거지가 지름 6~7m 규모의 원형 또는 방형 수혈 주거지인데 비해 그 규모가 큰 역삼동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지금까지 핵가족 단위로 주거 생활을 하던 씨족 공동체 사회가 청동기 문명이 확산되면서 사회 분화가 일어나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출현하는 과도기적 주거 공간으로 출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경제 생활은 농경이었으며, 양재천의 어로와 인근 야산의 수렵도 가능하였다고 판단된다.

[위치]

한강 지류의 하나인 양재천강남구 도곡동의 표고 90m의 매봉산 구릉 위에 해당되며, 매봉터널도곡공원 지역이다. 발굴 당시 주소는 역삼동 산 21-1였으며, 그 일대는 표고 100m 이내의 줄기가 이리저리 뻗은 준평원이다. 유적지에서 정남 약 10㎞ 전방에 표고 544m의 청계산이 있고, 동남방에 283m의 구룡산, 서쪽으로 290m의 우면산이 바라보인다. 그 산 사이에 양재천이 흘러 한강으로 흘러든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66년 숭실 대학교 사학과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1968년 발굴 보고 논문이 발표되었다. 아울러 출토 유물은 숭실 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형태]

길이 16m, 너비 3m, 깊이 50~60㎝ 크기의 장방형 수혈식 주거지이다. 수혈 바닥에서 약 5~6㎝ 정도의 높이가 생토층이고 그 위에 부식(腐蝕)토층이었다. 또 수혈 벽을 따라서 직경 10~15㎝, 깊이 10㎝ 내외의 기둥구멍이 1~2m 간격으로 나 있었으며 그 중에는 참나무 기둥이 불탄 채 숯 기둥으로 서벽 중간지점과 동벽 북단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혈 중간 부분에서는 기둥구멍이 찾아지지 않으며, 화덕자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주지의 실내면적은 약 12평[약 48㎡]으로 현대의 15~16평 가옥에 해당되어,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2~3세대의 연립형으로도 보인다.

[출토 유물]

출토 유물은 석부 3점, 석착 2점, 석촉 3점, 반월형 석도[미완성품] 1점, 숫돌 6점, 연석 등 20여 점과 석기 20여 점과 복원이 가능한 심발형 공렬 민무늬 토기와 호형 민무늬 토기, 붉은간토기 등이다.

[현황]

발굴 지역은 보고서 작성 후 다시 매립되고, 그 위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체육 시설이 들어서 있다. 강남 지역 개발로 유적이 보존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강남구청에서 주거지를 다시 복원하여 관광 자원화를 계획하고 있어 사적지의 부활이 기대된다.

[의의와 평가]

서울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주거지의 존재와 형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연대는 청동기 시대에 속하지만 미생식(彌生式)토기의 출현보다 더 내려가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즉 기원전 7세기~4세기 사이에 생활했던 주거지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