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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055
한자 沙平渡
이칭/별칭 사리진(沙里津)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집필자 소현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고려 시대 - 관에서 진(津) 개설
변천 시기/일시 조선 시대 - 관영숙소 사평원 개설
폐지 시기/일시 현대 - 한남대교 건설
비정 지역 사평도 -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지도보기
성격 나루
관련 문헌 『증보문헌비고』|『신증동국여지승람』|『만기요람』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일대 한강변에 있었던 나루.

[개설]

나루라는 의미로 가장 흔하게 ‘도(渡)’·‘진(津)’이 쓰였으며 그밖에 ‘제(濟)’·‘섭(涉)’이 있었다. 도는 주로 관용(官用) 나루를, 진은 주로 민용(民用) 나루를 가리킨 것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미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게 된다. 황하와 같이 큰 강을 건널 때에는 ‘도하(渡河)’라고 하였고, 보다 작은 한강·임진강·압록강과 같은 강을 건널 때는 ‘진강(津江)’이라 하며, 한강 상류의 달천 등 강의 지류인 하천을 건널 때는 ‘제천(濟川)’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전답 사이에 흘러가는 도랑물을 건널 때는 ‘섭수(涉水)’라고 하였다. 강폭의 넓고 좁음에 따라서 의미의 차이를 두어 사용하는 용어를 차별화하였다. 또한 강을 건너는 방법은 국왕과 일반 백성이 달랐다. 국왕이 건너는 나루는 삼전도와 조선 시대 제1의 도선장이었던 한강진이 대표적이었다. 부교(浮橋) 가설(架設)은 세조연산군 등 초기부터 그 기록이 있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여 임금의 잦은 능행에 대비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나루의 운영은 마을이나 민간의 손으로 이양되었다. 사람이 많이 건너다니는 나루는 입찰을 거쳐 선정될 정도로 이익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뱃사공들은 외지인들에게는 뱃삯으로 돈을 받았지만 주민들에게는 대개 봄에 보리 한 말·가을에 벼 한 말씩, 혹은 가을에 쌀 한 말씩 받는 식으로 ‘나루 추렴’을 하였다. 그러다 나루가 폐쇄되기 직전에는 건너는 사람들이 없어 모두 돈을 받는 식으로 바뀌었다. 한강의 나룻배는 1970년대 이후 강 위에 많은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서 점차 그 자취를 감추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말까지 언주면에 속했던 신사동 일대에는 새말[한강새말]·동산말·모래벌[모래말] 등의 마을이 있었다. 신사동에 있었던 ‘모래벌’ 즉 ‘사평(沙坪)’은 벌판 이름이기도 했지만, 그 벌판 속 마을 이름이기도 했다. 사평 땅에 국가적인 나루가 설치된 것은 고려 때이다. 고려는 전국의 도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각지에 역(驛)과 원(院), 진도(津渡)를 설치했는데, 이곳에는 ‘사평도’라는 나루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불렸으며, 당시 임진강에 설치되었던 임진도(臨陣渡)와 함께 고려의 대표적 나루였다. 사평도는 고려 시대에도 서울에서 용산·충주로 통하는 큰 길의 요충지였다. 사평도는 강북의 한강진을 연결하여 도성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한강 조운로(漕運路)였다. 조선 후기에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으로 인식하여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15세기에는 국가가 관료 및 길손들의 편의를 위해 관영 숙박소인 원(院)을 설치하여 사평원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숙박 시설인 사평원(沙坪院)은 점차 기능을 잃어 폐쇄되고, 얼마 뒤에는 사설 주막이 등장하여 그 기능을 이어받게 된다. 조선 시대 한양 사람들이 남쪽 지방으로 갈 때는 말죽거리길, 즉 양재도(良才道)라는 대로를 많이 이용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이용하던 나루가 사평도였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도로를 대-중-소로 구분해 관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큰 도로였던 제4로와 제5로가 이 사평나루를 건너게 되어 있었다. 남쪽 지방에서 서울이나 북쪽 지방으로 가는 행인들은 양재역에서 쉰 후, 사평리 주막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나루를 건너갔다. 일본과 국교가 이루어진 후에 통신사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그 통신사들이 오간 것도 주로 이 길이었다.

조선 후기 사평도가 있던 신사동에서는 사상활동(私商活動)을 통한 상업이 성했다. 당시 이 곳 언주면 일대의 물산으로 앵두·생지황·금은화 등이 유명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앵두는 이곳이 최적지였다. 한강변 특히 압구정 앞 강은 민물게 산지로 유명하였다. 사평장(沙坪場)에서는 미곡과 과일 등의 농산물과 면포나 마포 등 농가 부업으로 제조된 옷감들, 연해안에서 길을 수송되어 온 수산물, 사기나 도기 등 장인들이 제조해 낸 생산품까지 다양한 물품들이 거래되었다. 사평장은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가는 중간 매개지로서 요즘의 도매 시장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25년 한강의 을축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번창해가던 사평의 교역시장은 삽시간에 텅 빈 모래벌로 변하였고, 이곳 주민들은 다시 새말 부락을 형성하였는데,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의 피난민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반농·반상업의 마을로 변모해갔다. 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아직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던 때라, 서울시민의 채소 공급은 주로 강남 지역 일대에서 맡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당시 강의 남북을 왕래하는 나룻배는 채소 보따리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한남대교가 건설되어 도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점차 쇠락하여 나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한남대교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로 진입 역할을 하는 교량으로써 경부고속도로 계획과 더불어 착공된 한강에 네 번째로 놓인 도로 교량이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개통됨으로써 한남대교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전 지역의 일일생활권 시대를 여는 동시에 서울 강남 지역의 대규모 개발 시대를 열게 한 중요한 다리이다. 건설 당시 제3한강교라 불렸던 것이 1985년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한강 다리의 이름을 정리하면서 한남대교로 바뀌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사평리(沙平里)는 현재의 신사동 지역 즉,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남동과 마주하는 곳이었는데, 서울에서 남부 지방으로 왕래하는 대로의 길목이자 사평도라는 나루터가 있어서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가 되어 왔다.

[관련 기록]

고려 시대 공민왕 10년(1361)에 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왕족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임진나루를 건너고 한양을 지나 사평원에 닿아서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 다시 이 나루를 건널 것인가 하고 탄식하며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또한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사평강에 배 띄우고’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여기서 당시 사평도의 정경을 떠올릴 수 있다.

피로한 말이 걸음도 느린데 길은 험하고 길다

안장을 부리고 애오라지 여기에 머무리라

[중략]

뱃사공은 앉아서 물이 깊고 얕음을 알고

나룻사람은 능히 바람이 있고 없음을 점치네

급히 흰 비단을 찾아 그림을 그려야겠는데

한 쌍의 한가한 오리 쇠잔한 갈대 속에 졸고 있네

당시 나루의 모습은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등 실경산수를 그린 회화 자료를 통해 볼 수 있으며, 이후의 나루 모습들은 한말에 촬영된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평도와 관련한 역사적 일화가 있는데, 인조 2년(1624) 2월 8일에 이괄(李适)의 반란군이 서울까지 침입하자 인조가 밤에 도성을 빠져나와 한강나루에 와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사평도에 도착하였으며, 길목의 사평원에 이르러 의이죽으로 요기하였다고 한다.

영조 31년(1755)에 병조판서 홍상한(洪象漢)[1701~1769]의 상소에서 ‘사평·광진(廣津)·누원(樓院)·검암(黔岩) 등 장시(場市)가 월에도 6차에 걸쳐 교역이 송파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는데, 이것은 이곳 주민들이 서울 밖의 중도아(中都兒) 무리들과 난전(亂廛)의 무리를 유인하여 삼남 및 북도(北道), 그리고 영동의 상고(商賈)까지 모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부터는 상업 교역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평리는 수륙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배후에 농산물이 풍부한 광주평원이 있어서 산물의 집산에 유리했기 때문에 지역 상권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사평장은 인근 송파장과 더불어 전국 15대 장시에 속할 정도였다.

그밖에 사평도와 관련한 내용은 향토지 성격을 갖는 『강남구지』·『강남의 향토문화 기행』·『강남구 향토지』 등의 현대 자료에 수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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